[역사속 오늘리뷰] 9월 20일 1차 쌍성보 전투 발발
[역사속 오늘리뷰] 9월 20일 1차 쌍성보 전투 발발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09.20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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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성보 전투를 주도한 한국독립군 총사령 지청천./사진=연합뉴스
쌍성보 전투를 주도한 한국독립군 총사령 지청천./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32년 9월 20일 한국독립당 산하 한국독립군과 중국 측 항일의용군이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인 1차 쌍성보 전투가 발발한 날이다. 1차 전투에서 대승했지만, 2차 전투에서 패전했다. 만약 2차 전투까지 승리했다면 중일전쟁 양상은 달라졌을 것이고, 우리나라는 승전국으로 해방 이후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만주사변 이후

1931년 민주사변으로 일본군이 만주를 점령했다. 그러면서 한국독립당 산하 한국독립군은 많은 난관에 부딪히게 됐다. 이에 중국 측 항일의용군과 함께 각지에서 일본군 및 만주군과의 싸움을 전개했다. 이런 가운데 쌍성보가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됐다. 쌍성보는 장춘(長春)∼하얼빈 간 철도 사이에 있는 도시로서 만주 물산이 집결되는 요충지였고, 친일부호와 고관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일제침략의 거점이었다. 그리고 만주군 차오페이단(剿匪團)의 주력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에 한국독립군과 중국 측 항일의용군은 쌍성보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과 만주군을 몰아내기 위해 전투를 벌이게 됐다. 쌍성보 전투 당시 한국독립군은 총사령 지청천과 부사령 김창환, 참모장 신숙과 조경한·최악·안종명·심만호·차철 등이 있었다. 병력은 500명 내외였다. 중국측 항일의용군 부대는 가오펑린[考鳳林] 등이 거느리는 수천명의 길림자위군군과 훙창대[紅槍隊]·헤이창대[黑槍隊] 등의 종교세력 항일의용군 등 대략 2~3만 정도였다. 1차 쌍성보 전투는 9월 20일 밤 8시부터 약 2시간 걸쳐 이뤄졌다. 한국독립군은 쌍성보의 서문 공격을 담당했다. 해당 전투에서 한중연합군은 치열한 공방전 끝에 쌍성보성을 점령하고 많은 구수물자를 노획하고, 약 2천여명의 만주군을 생포했다. 1차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독립군이 서문을 돌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뒤 일본군과 만주군 연합 대부대가 반격하면서 쌍성보를 빼앗겼다.

2차에서 패배

2차 쌍성보 전투는 11월 17일부터 22일까지 5일간 진행됐다. 17일에는 쌍성보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일본군과 만주군은 다시 탈환하기 위해 20일 폭격기까지 동원했다. 결국 막강한 화력에 밀리면서 한국독립군과 중국 측 항일의용군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중국 측 항일의용군 일부 부대가 겨울을 견디기 어렵다는 이유로 투항하려고 했지만 한국독립군은 결사항전을 했다. 2차 쌍성보 전투 이후 한국독립군은 더 이상 중국 측 항일의용군과 협력해서 항일 투쟁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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