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9월 26일 일제강점기 당시 부산 부두노동자 총파업
[역사속 오늘리뷰] 9월 26일 일제강점기 당시 부산 부두노동자 총파업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09.26 0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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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일기를 찢어내는 드라마 각시탈 한 장면.
욱일기를 찢어내는 드라마 각시탈 한 장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21년 9월 26일은 일제강점기 당시 부산 부두노동자 총파업이 있었던 날이다. 당시 부산은 우리나라 산업중심지 중 하나이고, 부산을 통해 수출입총액이 6천400만원으로 한반도 항만을 통과하는 수출입 화물총액의 30~40%를 담당했다. 이에 부산 항만에 종사하는 부도노동자들이 가장 많았다. 부두항만 노동자들이 많은 이유는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 때문이다. 토지조사사업은 기존의 토지 체제를 완전히 부정하고 일제강점기의 토지체제로 변화를 시켰다.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무너진 농촌

조선시대는 전국 토지가 사실상 국유지였다. 지주에게 소유권이 부여된 것이 아니라 도지권(賭地權)을 부여했다. 지주는 해당 토지에서 경작하는 농민들에게 소작료를 받고, 대신 해당 토지에서 거주하는 농민들의 경작권을 침해하지 못했다. 즉, 해당 토지에서 거주하는 농민들이 경작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지 않는 이상 지주들은 농민을 마음대로 쫓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지주에게 ‘소유권’을 부여하는 대신 해당 토지에서 경작하는 농민의 경작권 등을 아예 부정했다. 즉, 하루아침에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는 언제든지 지주에 의해 쫓겨날 수 있고, 하루아침에 토지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토지를 잃어버린 농민들은 만주로 항일독립운동을 떠나거나 먹고 살기 위해 부두 노동자가 돼야 했다.

비참한 부두노동자의 삶

일본제국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으로 참전하면서 경제 호황을 누렸다. 당시 유럽은 전쟁터이고,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초반에는 중립국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다보니 연합국인 유럽 국민들의 물자를 담당하는 나라가 일본제국주의가 됐다. 이에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제국주의의 경제성장률은 엄청 높았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유럽 각국은 자국에서 물자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일본 제품을 거들떠 보지 않았다. 이에 1920~1921년 경제공황이 불어닥쳤다. 이에 실업률이 상당히 높아졌다. 이는 부두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루 15~16시간 노동을 해도 1원 미만의 임금밖에 받지 못했다. 여기에 경제공황이 닥치면서 노동자들의 임금을 계속해서 깎아 내려갔다. 그리고 1921년 9월 각 운송업자 사이에 화물의 거래가 한적하게 되면서 이익이 남지 않는다면서 또 다시 노동자의 임금을 깎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9월 12일 석탄운반부 노동자들이 고용주들에게 파업선언서를 보냈다. 회답은 15일까지로 요구했다. 하지만 고용주는 회답하지 않았고, 석탄운반부 노동자들이 16~17일 파업을 단행했다. 그러자 고용주는 25일까지 회답하겠다고 밝혔다. 그 사이 다른 노동자들도 대규모 파업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26일 결국 부산 부두노동자 파업이 결행됐다.

일제 동원한 고용주들

파업이 결행되자 고용주들은 일제 경찰과 행정당국, 각종 어용단체들을 동원해 파업을 막아내려고 했다. 이에 위협과 공갈 등 탄압을 자행했다. 일제 경찰은 파동지도부들을 체포·구금했다. 29일 담판이 벌어졌고, 30일에도 담판이 이뤄졌다. 결국 10~15% 임금 인상을 쟁취하면서 파업은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나게 됐다. 부산 부두노동자 총파업은 이후 1920년대 노동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만들었다. 1920년대 일본제국주의는 사회주의운동 등이 이뤄졌는데 부산 부두노동자 총파업은 한반도에도 사회주의 운동이 전파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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