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서희 외교 담판은 현대에서도 높게 평가하는 외교 역사 중 하나이다. 서희가 거란 장수 소손녕과 담판을 지어서 강동6주를 얻었다.
이 강동6주는 여요전쟁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만약 서희 외교 담판이 없었다면 고려가 송나라 등을 꺾고 강대국이 될 수 있었을까는 의구심도 들 정도이다.
그만큼 우리 역사에 있어 중요한 변곡점 중 하나가 바로 서희 외교 담판과 강동6주 획득이라고 할 수 있다.
소손녕의 침입, 그 목적은
고려는 태조 왕건 때부터 거란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태조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킨 족속이라면서 선물로 보내온 낙타를 굶겨 죽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광종 때인 960년 송나라와 통교를 시작했다.
여기에 발해 유민들이 세운 국가인 정안국도 송나라와 화친을 하면서 거란에 대항했고, 986년 거란이 정안국을 멸망시키면서 고려에 송과 친교를 끊고 거란에 화친할 것을 요구해왔다.
그리고 993년 10월 요나라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다. 하지만 소손녕의 고려 침공이 과연 의도를 갖고 침공을 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사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군대의 숫자가 적었다는 점이다. 소손녕은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왔다고 했지만 ‘거짓말’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소손녕의 직책이 동경유수였고, 동원할 수 있는 군사의 수는 최대 6만명이다. 즉, 고려를 침공할 당시 6만에도 미치지 못하는 군대로 침공을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소손녕의 수상한 행적
소손녕의 행적을 살펴보면 수상하다. 고려를 쳐들어오는데 안주성이 아니라 안융진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고려의 수도를 가기 위해서는 안주성을 통해 가야 가장 빠르고 확실하다. 왜냐하면 안주성을 점령해야 후방을 안정시키고, 그에 따라 개성으로 빠르게 갈 수 있다.
하지만 안융진은 성의 크기가 작을 뿐만 아니라 개성으로 가는 길목도 아니다. 현대사학자 중에는 소손녕이 마치 전국 유람을 다니는 듯 했다고 표현하는 학자가 있을 정도이다.
문제는 안융진을 공격하다가 대도수에게 소손녕 군대가 패배를 했다. 더욱이 안융진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자신은 80만 대군을 이끌고 왔으니 고려는 항복을 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은 것을 보면 개성까지 쳐들어갈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소손녕은 고려를 공격한 이유가 고려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갈(여진)에서의 약탈이 여의치 않자 물자가 풍부한 고려에서의 약탈을 위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강동6주,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어쨌든 서희 외교 담판으로 인해 강동6주를 고려는 획득했다. 강동6주는 당시 고려 땅도 아니고, 거란 땅도 아니다. 마치 소손녕이 고려에게 강동6주를 넘겨준 것처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엄격히 따지면 고려가 말갈을 공격해서 강동6주를 획득할 것이니 거란은 그에 대해 간섭을 하지 말라는 것이 외교 담판의 핵심이었다.
거란 입장에서도 고려가 강동6주를 획득하는 것이 이득이었다. 거란으로서는 송나라를 쳐들어가기 전에 고려와 통교를 하는 것이 가장 좋다. 거란 지역이 물자가 풍부한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주로 교역을 해서 얻거나 약탈을 해서 얻어야 했다.
이런 이유로 거란은 말갈(여진)땅을 약탈해서 물자를 공급받았다. 하지만 고려와 통교를 하게 된다면 교역을 통해 물자를 얻기 때문에 강동6주를 고려가 가져가는 것을 용인하면 그만큼 거란에게 이득이 된다. 실제로 소손녕은 서의 외교 담판 이후 거란 황제에게 보고를 했을 때 상당한 칭찬을 받았다.
고려 입장에서도 강동6주를 얻는다는 것은 영토의 확장뿐만 아니라 방어와 함께 대륙 진출의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1석 3조의 효과가 있다. 이후 여요전쟁 100년사에서 고려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강동6주를 얻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