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76년 재미사업가 박동선 등 로비스트들이 미국 의회에 불법 로비를 했다는 사실이 미국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우리나라와 미국 간 외교적 마찰이 발생한 정치스캔들이다. 로비스트 이름을 따서 ‘박동선 사건’이라고 불렀다.
해당 게이트는 박정희 정부와 카터 행정부 간의 관계 악화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 정권이 10월 유신을 단행하면서 점차 독재 국가로 변모해 갔다. 이에 미국 내에서는 한국의 인권탄압과 반민주적 움직임에 대해 비판적인 여론이 형성됐다.
이와 더불어 닉슨 미국 대통령이 1972년 헨리 키신저를 통해 중국과 교류를 하면서 데탕트가 형성됐다. 이에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이 제기됐다. 주한미군 철수는 닉슨부터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등으로 이어지면서 박정희 정부는 상당한 압박감을 느껴야 했다.
박정희 정부는 주한미군 철수에 따른 북한에 대한 안보우위를 담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국가 예산에서 국방비의 증액이 불가피하고, 이에 따라 산업에 투자될 예산 비중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만약 경제성장이 계속 이어지지 않는다면 박정희 정권은 더욱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주한미군 철수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박정희 정권은 로비스트를 통해 주한미군 철수 시도를 막고, 한국 내 인권 문제를 미국 측이 제기하는 것에 대해 저지를 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여기에 1972년 10월 유신을 단행하면서 포드 행정부는 10월 유신에 대한 청문회를 1974년과 1975년에 거쳐 여는 등 제4공화국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가고 있었다.
워싱턴포스트지에서
이런 가운데 1976년 10월 24일 워싱턴포스트는 10면에 걸쳐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박동선과 중앙정보부 등이 미국 상하원 및 유관 공직자들에게 매년 50만 달러에서 1백만 달러에 이르는 현금을 포함한 불법 로비를 펼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후 미국 언론에서는 대서특필을 하면서 코리아게이트라고 명명하면서 거대한 스캔들로 발전했다. 이에 미국 하원에서도 국제관계소위원회, 이른바 ‘프레이저 위원회’가 구성돼서 청문회가 열렸다.
프레이저 위원회에서는 3선 개헌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토사구팽 당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출석해서 박정희 정권을 고발했다.(김형욱 전 중정부장은 이후에도 언론인터뷰와 출간을 통해 박정희 정권의 비리 등을 폭로하려고 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행방불명이 됐다)
미국 정부는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박동선 로비스트와 김동조 전 외교부 장관 등의 송환을 한국 정부에게 요청했지만 박정희 정권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군사원조를 끊겠다’ 등의 외교적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카터 정부의 문제
코리아게이트가 진행되던 시기는 닉슨~포드~카터 시기였다. 세 명의 대통령 모두 유신정권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닉슨은 인권 문제를 거론하기는 했지만 한국정부와 정면충돌을 피하려고 했다.
포드는 ‘인권은 인권’ ‘경제는 경제’ 등 철저하게 분리주의를 택했다. 그 이유는 베트남 전쟁 실패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터는 상황이 달랐다. 카터는 인권을 중시했고, 선거 운동 역시 인권을 강조했다. 여기에 카터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다. 그러다보니 주한미군 철수 문제와 인권 문제 등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이와 더불어 카터는 방위비 분담금 인상이나 인권 개선 등을 요구했지만 박정희 정부는 긴급조치 9호로 응답했다. 즉, 미국으로부터 받은 압박을 오히려 독재 체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