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45년 2월 19일은 태평양 전쟁 속 이오지마 전투가 발발한 날이다. 태평양 전쟁의 가장 치열한 전투이면서 미군에게 원자폭탄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준 전투이다.
서태평양 전략적 요충지인 이오섬을 두고 벌어진 미 해군 및 해병대와 일본제국 육군 및 해군육전대 간의 전투이다.
이오지마는 도쿄에서 정남쪽 1216km 떨어진 섬으로 작은 화산섬이다. 하지만 일본 해군이 이곳에 비행장과 레이더 기지를 건설한다. 그것은 미 육군항공대 B-29 폭격기를 요격하거나 본토에 경보를 주기 위한 것이다.
거꾸로 미 육군 항공대 역시 일본 본토를 포격할 때 일본 요격기를 무력화해야 하기 때문에 B-29 폭격기의 호위기인 P-51 머스탱을 띄울 비행장이 필요했다.
기존 전술과 다른 전술
이오지마 전투는 기존 전투와는 완전히 다른 전술을 일본군이 보여줬다. 기존 전술은 해안가에 참호를 파고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미군의 폭격에 의해 무력화되기 때문에 미군은 사실상 무혈입성을 했다.
하지만 이오지마 수비대 사령관으로 부임한 루리바야시 다다미치 장군은 해안가 참호 전술을 과감하게 포기했다. 이에 땅굴을 파고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또한 기존 일본군의 전술이었던 옥쇄 돌격 역시 엄격히 금지했다. 기존에는 미군만 보이면 ‘덴노헤이카 반자이’라고 외치고 무조건 달려 나갔다. 그러다보니 미군은 어느 방향에서 일본군이 쳐들어온다는 것을 미리 알 수 있었다. 이것을 금지했다.
이 두 가지의 전술이 바뀐 것은 주효했다. 해안가 참호전이 아닌 땅굴을 파고 들어가면서 미국의 폭격에서 희생을 최소화했다. 또한 옥쇄돌격을 금지하면서 병력을 조금이라도 오래 유지할 수 있었다.
만약 태평양 전역에서 모든 일본군 사령관들이 이 방침을 따랐다면 미국의 진격은 더욱 지체됐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당황한 미군
미군은 당연히 일본군이 해안가 참호를 파는 전술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미 태평양 함대는 1944년 6월부터 무려 아홉달이나 이오지마에 폭격을 가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지하 동굴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미군은 상륙을 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저항이 없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워낙 작은 섬이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점령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여지 없이 무너졌다.
또한 옥쇄돌격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일본군은 반자이 돌격도 하지 않았다. 상륙부대가 해안선을 상륙하고 진지를 구축하던 중 일본군의 기관총 사격과 동굴 벙커에서 일본군 포병의 사격이 시작됐다. 그렇게 해서 당일 미 해병대 2500여명이 전사 및 부상을 당했다.
물론 일본군 역시 상당히 많은 피해를 입었다. 수비군 2만 2천여명 중 살아남은 사람이 5천에 불과했다.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일본은 땅굴 벙커에서 전투를 했다. 그러면서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에 미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3월 26일 쿠리바야시는 남은 병력 300여명을 이끌고 마지막 돌격을 감행했지만 전사했다. 이것이 일본군의 마지막 공격이었다.
결국 금방 끝날 것이라는 전투가 1개월 이상 이어지면서 미군은 영광의 상처를 안아야 했다. 일본군보다 미군의 인명 피해가 더 컸다.
이오지마 전투가 일본군에게는 오히려 희망을 주게 됐고, 미군에게는 일본에게 보다 강력한 위력을 보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고, 이에 원자폭탄을 사용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