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 1973년 제1차 오일쇼크 이후 국제유가 급등으로 막대한 오일 달러를 벌어들인 중동지역 국가들은 대규모 건설공사가 포함된 경제개발계획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국내 건설업체들은 불황에 빠진 국내 건설경기를 타개하고자 해외로 눈을 돌려 중동 진출 열풍을 이뤘다. 정부도 1975년 12월 대중동진출 촉진 방안을 수립하고 해외건설과 인력송출을 지원했다. 해외건설 활황은 자본시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1970년 초 48개에 불과했던 상장사는 1978년 356개사가 되었다.
1960년대 100억~200억 원대에 머물던 거래대금은 1970년대에 1조원을 돌파한다. 당시 주도주는 단연 수출 및 해외건설업종이었다. 동아건설, 대림산업, 경남기업, 삼익주택 등의 기업이 국내산업을 선도했다.
건설업종의 상승 추이는 1977년에는 연초대비 135.4%의 상승율을 나타내면서 장세를 주도했다. 건국 이래 최대의 외화벌이였던 중동 특수는 1976년 본격화되어 1980년 중반까지 이어졌다. 1982년 중동 수출 근로자는 15만 1,500여 명으로 전체 남성 근로자 수의 2%에 가까웠다.
1960년대 독일광부, 베트남 파병을 압도하는 대규모 인력수출이다. 건설업체 등은 너도나도 중동해 비행기에 탑승할 청년 근로자 모집 광고를 내걸었다. 압구정동에서 강남까지 개발붐으로 주식거래는 전년의 2배를 넘겼다. 일반 제조업체가 건설업 진출 계획만 내어도 상한가로 진입했다.
회사 이름에 건설이란 말이 붙어있어도 건설업체로 포장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건설업체 재킷만 입으면 어디든지 외상이 가능할 정도로 건설업체에 대한 인기가 높았다. 중동지역에 건설 붐이 일어나고 강남개발 등으로 인해 국내 건설 기업들이 크게 실적이 늘어나면서 건설주의 주가는 나날이 크게 올라갔다.
당시 다이아몬드 주로 불리웠고‘묻지마 건설주’투자가 확산됐다. 동아건설 대림산업 등의 주가는 3년 반 만에 50배 폭등했다. 호황을 맞은 건설주들의 주가는 미친 듯이 오르며 그 끝을 알 수 없는 듯 했다. 그러나 1978년 6월 28일을 정점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 원인은 지나친 시장 과열 현상으로 정부가 나서서 규제 정책을 내놓았고 몇몇 기업 등이 도산하면서 시장의 분위기가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큰 피해를 본 투자자들은 거래소와 증권사를 찾아 격렬히 항의하는 일이 속출했다. 당시 증권사 지점장이 자살하고 실직자들이 쏟아지는 등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979년 2차 석유파동까지 불거지면서, 1979년 이란의 석유 수출 중단 발표를 발단으로 건설주는 이미 회생불능 상태가 되었다. 1979년 건설업업종지수는 1년 반 만에 시가총액의 70%가 사라진 셈이다.
대표적인 큰손으로 알려진 광화문 곰은 원래 땅부자였다. 1980년 12월 테헤란로 에 있던 9천 평의 땅을 평단 75만 원에 토지개발공사에 넘겨주고 받은 돈 43억 원으로 건설주를 몽땅 매수했다가 1982년 장영자 파동으로 엄청난 손실을 봤다. 그를 둘러싼 이야기 중 하나, 어느 날 증권회사 객장에 나와 시세판을 본 후 건설주를 맨 위에서부터 맨 아래까지 10만 주식 매수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1982년 장영자 어음 사건은 단군 이래 최대의 사기 사건으로 사채시장의 마비와 주식시장의 건설업체들의 유동성 위기를 가져왔다. 장영자씨는 중견건설업체로부터 대규모 어음을 받아 사채시장에서 할인하는 방식으로 막대한 현금을 굴렸다. 현금은 다시 다른 회사에 빌려주거나 건설주 매수 등에 사용했다. 현금부족에 시달리는 기업에 접근하여 거액을 빌려주고 훨씬 많은 금액의 견질어음(유사시 상환요구됨)을 교부받는 행각을 반복했다. 공영토건에서는 빌려준 현금의 9배에 달하는 1279억 원을 약속어음으로 받아냈다.
처음 종잣돈을 제외한다면 마치 폰지사기나 다단계처럼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셈이었다. 장영자 부부가 받아낸 어음 총액은 7111억 원으로 당시 한국 GDP의 1.4%, 당시 한국 정부 예산의 10%를 차지할 정도의 거액이었다.
엄청난 규모의 사기 사건이고 이 사건의 배후에 청와대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 사건으로 일신제강, 공영토건 등이 모두 부도가 났다. 그리고 이철희, 장영자 부부에게는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형과 미화 40만 달러, 엔화 800만엔 몰수형, 추징금 1억 6254만 6740원이 선고됐다. 이후 국내 증시는 7년이라는 기간 동안 장기 침체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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