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역사] 1962년 증권파동, 4대 의혹사건 그 뒤엔?
[부의 역사] 1962년 증권파동, 4대 의혹사건 그 뒤엔?
  • 김진혁
  • 승인 2024.03.21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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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시장의 취약점을 드러내다, 증권파동 워커힐 호텔 사유재산 침해 군정 하의 빠징꼬 사건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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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 대한증권거래소 발행주식을 뜻하는 대중주는 투자자들에게 꿈이 블루칩이었다. 박정희 의장이 이끄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1961년‘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자본시장 육성을 천명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가격이 치솟았고 증권사들의 매점 전략에 극심한 품귀현상이 빚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거래소 시세보다 싸게 줏식을 공모하는 유상증자 발표에 논밭 판 돈을 들고 은행을 찾는 행렬이 이어졌다. 6개월 만에 80배가 올랐지만, 개미들의 장밋빛 꿈은 1년 뒤 잔고가 ‘70분의 1’ 토막 나는 처참한 종말을 맞는다. 증권거래소와 증권금융회사는 빚더미에 빠지고 투자가들 사이에는 자살 사건도 발생했다. 당시 창당자금 마련을 위해 군사정권이 증권사와 야합해 시세 조정을 했다는 소문이 많았다. 수사당국은 4대 의혹 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빠징꼬 사건)의 몸통인 증권파동의 전말을 드러냈다. 중앙정보부 특조단 조사에 따르면 1962년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휘하의 강성원 행정관과 윤응상 일흥증권 사장이 만나‘농협 소유 한국전력주식을 빌려주면 이를 크게 불려주겠다“는 취지의 말로 중앙정보부를 꼬드겼다. 이후 한전 주가를 끌어올린 뒤 내다 팔아 폭리를 취했고, 이 돈으로 다시 대증주 매점에 폭리를 취하려다 실패했다는 것이다. 특조단은 윤사장과 거래소 이사장 농협중앙회장 등 10여 명을 구속했다. 그러나 3개월 후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사태를 황급히 매듭지었다. 사건들은 의혹이 불거지면 대충 조사하고 적당히 처벌하고 흐지부지 넘어가는 식으로 조치되어, 실제로 어떠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진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실제보다 추잡한 내막이 있으리라 예상되지만, 확증은 없기 때문에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이때 모든 책임은 김종필이 졌는데 중정부장에서 물러난 후 일본으로 외유를 떠났다. 이듬해인 1964년 야당은 군사정권의 정치자금 조달을 위한 의혹 사건을 파헤치기 위한 국정감사를 제기했지만, 거대자금의 진실은 베일에 싸여 있다. 훗날 김형욱은 ‘박정희에게 일부 상납되고, 민주공화당 창당자금, 야당 교란 등의 공작자금으로 쓰였다’라고 폭로했다. ▶ 워커힐 호텔 사유재산권 침해 사건 중앙정보부가 외화 획득의 방편으로 UN군의 휴양지를 건설하기 위해 1961년 서울특별시 광장동에 워커힐 호텔을 지으려고 했다. 호텔건립공사가 자금난에 허덕이자 정부주금(市政府株金) 5억 3,590여만 원을 빌려주어 호텔을 짓도록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막대한 공작자금을 유용하였다. 공권력을 휘둘러 교통부 장관과 각 군에 여러 장비를 제공하게 하고, 형무소 죄수들과 각 군의 공병들의 무상 노역 인력을 동원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새나라자동차 공권력 횡령 사건 중앙정보부가 자동차공업을 육성시킨다는 명목으로 새나라자동차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일본제 자동차 400대의 수입과 판매를 담당하게 하였으나 수입허가 과정에서 공권력이 남용되어 횡령 등 부정행위가 행해진 사건이다. ▶빠징꼬 사건 군정하에서 1961년 12월 재일교포 김태준(金泰俊) 등이 빠징꼬라고 하는 도박성을 띤 회전당구기 100여 대를 재일교포 재산을 반입하는 것으로 속여 한국에 들여온 사건이다. 이후 계엄 상황에서도 파칭코 도박이 성행하여 여론이 들끓자 정부는 영업허가를 취소하고 김태준 등을 관세법 위반으로 체포함으로 매듭을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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