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역사] 1972년 8.3 사채 동결, 제2 금융권의 탄생
[부의 역사] 1972년 8.3 사채 동결, 제2 금융권의 탄생
  • 김진혁
  • 승인 2024.03.28 15: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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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조치? 8.3 사채 동결

지하자금 증권시장으로 유입

제2금융권 성황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 1972년 8월 3일 박정희 정부가 제도권 금융을 잠식하고 있던 지하금융, 즉 세금을 내지 않던 사채시장을 제도권 금융으로 흡수하기 위한 극단의 조치로서 긴급명령의 형태로 집행한 금융 정책이다.

60년대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실행에 따라 한국의 경제성장이 점차 궤도에 오르면서 기업의 숫자와 규모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금융 수요 역시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시 선진국들이 제도권 금융기관을 통한 대출과 투자의 형태로 기업운용자금을 조달한 데 반해 한국은 제도권 금융기관에 비축된 자금 자체가 미미했고 지하금융인 사채시장에서 유통되는 자금 규모가 제도권 금융기관을 압도했다.

은행보다 사채가 각광 받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타국처럼 한국의 제도권 금융기관이 건실하지 못했다. 경제성장에 따라 기업의 자금수요는 늘어났지만, 제도권 금융기관의 자금공급은 이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했다. 은행에서의 저축은 여전히 부실하여 기업이 돈을 꾸는 것이 쉽지 않았고 주식시장도 원활하지 못해서 증권 발행도 어려웠다.

둘째, 사채 금리가 연리 40~50%로 은행 금리보다 더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은행에 돈을 맡기는 것보다 공장이나 회사에 돈을 꿔주는 것이 더 남는 장사였다. 당시 은행의 금리보다 사채시장의 금리는 10~20% 정도 더 높았다. 이렇게 되니 사채업자는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까지 자금을 마련하여 회사에 빌려주었다. 그러자 명동과 소공동에는 100여 개 이상의 사채중개업소가 생겨났다.

이러한 사채시장의 성장과 기업의 사채 의존은 날로 갈수록 심각해졌다. 당시 기업들이 쓰는 돈의 30%가 사채였고 그 금리는 연간 30%를 넘었다. 부실기업들도 속출하여 1969년 5월에는 83개의 기업 중 45%가 부실 기업체로 분류되었다. 부실 기업체가 된 회사들은 제도금융권에서의 지위가 더욱 축소되어 사채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으니 악순환이 계속 이어졌고 사채를 빌려준 사람들의 상환 요구와 압력까지 겹치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그러자 정부는 이를 타개하고자 환율을 18% 상승시켰지만, 이는 곧 한계에 직면했다. 1970년 1달러 317원이었던 환율이 1971년 1달러 373원으로 늘어났지만 외국 차관의 상환일이 70년대 초반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기업의 부담은 늘어났다.

이 때문에 1963년 9% 성장을 기점으로 고도성장으로 질주하던 한국경제는 70년대에 들어서 경제성장률이 급락해 큰 위기가 닥쳐왔다. 게다가 세계 경제의 변화도 타격을 안겼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성장을 거듭하던 미국 경제가 60년대 후반 서유럽과 일본의 경제성장으로 인해 정체 상태에 다다른 데다 여기에 베트남 전쟁 참전으로 엄청난 경제적 부담으로 다가왔고 달러화의 약세까지 더해서 불황이 발생했다.

그러자 1971년 8월 미국은 수입품마다 10%에 달하는 부가세를 매기고 금과 달러의 교환을 중지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이로 인해 미국 수출에 의존하던 대한민국은 국제적인 경제위기에 휘말렸다.

이렇게 되자 1971년 6월 전국경제인연합은 박정희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전경련회장 김용완은 박정희에게 기업들의 상황을 설명하고 자신들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에 박정희 정부는 기업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기업의 사채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모색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1972년 8월 2일 오후 11시 40분 박정희 정권은 긴급명령권을 사용하여 이른바 '8.3 조치'를 전격발표했다. '경제의 안전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이라는 이름하에 발표된 이 조치로 사채들을 동결해 버렸는데 채권자들은 빌려준 돈의 출처를 밝혀야만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 조치는 8월 3일 0시부터 시행되었고 사채 동결을 위한 일주일 간의 신고 접수가 이뤄졌다. 처음에는 주춤하는 눈치였으나 정부가 "신고된 사채에 대해서는 자금출처조사를 하지 않겠다"라며 적극적으로 홍보하자 곧 신고가 줄을 이었다.

8월 3일부터 8월 7일까지 신고된 사채는 40,677건, 3,456억 원에 달했는데 이는 전체 통화량의 약 80%이자 대한민국 여신 잔액의 34% 수준이었다. 이는 신고액이 1800억 원 정도라고 본 정부의 예상을 2배 가까이 뛰어넘은 것이었다.

한편 이 조치에 야당은 크게 반발했는데 대통령의 조치가 국민의 사유권을 침해하고 있으며 긴급명령의 정당성에도 의문이 있다며 비판했다. 이에 청와대는 이 조치가 불가피한 것이라며 그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결국 1972년 9월 9일 국회는 8.3 조치를 승인하였다.

8.3조치의 긍정적인 효과는 표면적으로 1972년 7.2% 성장에서 1973년 14.8% 성장으로 대폭 늘어났다. 세금을 내지 않던 사채시장은 크게 위축된 데 반해 지하금융의 자본이 제도권 금융으로 흡수되면서 장기적으로 자본시장이 정상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채동결조치는 기업의 숨통을 일시적으로 틔워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사금융을 위축시켜 기업의 자금난을 극심하게 만들었다. 지하자금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여 산업자금화할 목적으로 ‘단기금융법’ ‘상호신용금고법’ ‘신용협동조합법’ 등을 제정하고 비은행권 금융회사 설립을 허용했다. 투자금융회사, 상호신용금고, 신용협동조합은 이때 생겼다. 1976년 국제 단기자금 주선과 지급보증 등의 업무를 취급하는 종금사가 생겼다.

투자금융회사는 직접 채권을 발행하거나 회사채를 인수한 뒤 은행보다 높은 금리로 판매하는 등 사채시장의 자금을 끌어모으며 급성장했다. 투자금융회사는 외국에 없는 한국만의 특수한 형태였다.

20년 이상 기업에 돈을 빌려주는 단기자금 조달 창구이자 사채업자들의 이용 창구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다가 1997년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몰려 퇴출되었다. 이후 상호신용금고는 상호저축은행으로 신용협동조합은 신협, 마을금고는 새마을금고로 각각 발전했고 이를 통칭해서 제2금융권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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