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P란
김대중 전 대통령의 79석은 제15대 총선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에 따라 DJP 연합이 탄생했다. DJP 연합은 제15대 대선 당시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와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이 공동 여당을 목표로 결성한 연합을 말한다. 해당 연합이 성공하면서 국민의정부가 출범했다. 이는 6공화국의 최초이면서 유일한 연립정부로 기록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2년 14대 대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패배한 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지만 1년만에 귀국하면서 아시아태평양 평화재단(아태재단)을 만들면서 정계 복귀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직후 정계 복귀를 공식적으로 선언했지만 민주당 당내 인사들까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복귀에 반대하는 분위가 강했다. 민주당은 1991년 평화민주당과 꼬마민주당이 합당하면서 창당한 정당이었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동교동계와의 갈등이 상당했다. 이런 가운데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동교동계가 지원하는 후보들이 대거 당선되면서 정계복귀의 가능성이 열렸다. 1995년 7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민주당을 탈당해 새정치국민회의라는 신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는 79석을 얻는데 그쳤다.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은 139석으로 원내 1당 자리를 차지했다. 이대로 가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권 가도에 적신호가 켜지게 된 것이다.김종필과 손을 잡게 된
이런 가운데 충청을 기반으로 한 김종필 전 총재가 1995년 1월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그리고 15대 총선에서 충청권 28개 선거구 중 24개를 석권했고, 경기도에서 5석, 경북에서 2석, 강원도에서 2석을 차지했다. 특히 대구광역시에서는 13석 중 8석을 차지하면서 50석을 차지했다. 그러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재가 손을 잡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공조는 1996년 제15대 총선 직후부터 떠오르기 시작했다. 신한국당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야당이 뭉쳐야 한다고 판단했고, 이에 DJP 연합이 점차 가시화됐다. 하지만 두 사람은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견원지간이었고, 김종필 전 총재가 노태우 정권 시절 민주자유당을 만드는데 일조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 여론이 상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7년 11월 3일 김대중 당시 대선 후보가 김종필 전 의원의 청구동 자택을 직접 찾는 것으로 DJP 연합이 성사됐다. 그것은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실세형 총리로 김종필 전 총재를 앉힌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16대 국회에서 의원내각제 개헌을 합의하기로 했다. 결국 DJP 연합은 정권교체를 이뤄내게 됐다. DJP연대를 하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있었던 ‘빨갱이’ 이미지를 상당히 희석시켰다. 그러나 집권 2년차인 1999년부터 내각제 개헌을 두고 결국 결별을 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