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국공내전
[역사속 경제리뷰] 국공내전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4.04.11 13: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개석(왼쪽)과 모택동
장개석(왼쪽)과 모택동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국공내전은 1927년부터 1950년까지 국민혁명군과 인민해방군이 벌인 전쟁이다. 중국 대륙 패권을 두고 벌인 전쟁이다. 당시 중국공산당이 중국 중앙정부인 중화민국 국민정부를 상대로 일으킨 내란이다. 이로 인해 국민정부는 결국 대만으로 물러나면서 현재 타이베이가 됐다. 국공전쟁은 1차와 2차가 있는데 흔히 2차 국공전쟁을 역사가들이 많이 거론하고 있다.

화평교섭회장 열렸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 승리로 끝나면서 공산당과 국민당 정부의 회담이 열렸다. 그것은 정치의 민주화와 함게 독립적이고 자유로우며 부강한 중국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에 그해 10월 10일 협정을 발표했다고 해서 ‘쌍십협정(雙十協定)’이라고 부른다. 서로 일단 불가침 협정을 맺었다고 하지만 국민당이나 공산당 모두 협정을 이행할 생각이 아예 없었다. 그러면서 잦은 전투가 발생했다. 1946년 장제스는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쉽지 않은 공격이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공산당이 우세해졌다. 여기에 공산당은 미국에게 국민당이 정전협정을 어겼다고 하소연했고, 미국은 더 이상 진격은 안된다면서 만약 어기면 5억 달러의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경고를 내렸다. 그러면서 공산당은 힘을 길러냈고, 이에 중국 대륙 곳곳에서 국민당을 몰아내기 시작했고, 급기야 충칭까지 점령을 하면서 결국 국민당 정부 요인은 대만으로 피신을 가게 됐다. 그러면서 대만 정부가 수립됐다.

국민당이 패배한 이유는

국민당이 패배한 이유는 중일전쟁 때문이다. 중일전쟁 당시 국민당은 130만명의 사망자와 1천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반면 공산당은 피해가 적었다. 공산당은 일본군과의 교전을 피하면서 몸집을 불려나갔다. 반면 국민당은 자신이 갖고 있던 군대를 계속 투입해서 일본을 몰아내려고 했다. 그러다보니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후 병력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또 다른 하나는 경제력의 차이였다. 중국 공산당은 주로 만주 지역에서 활동을 했는데 일본제국주의가 만주국을 세우면서 그에 따라 만주국을 중심으로 산업이 발달했다. 반면 국민당은 중국 남쪽 특히 농사를 짓는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다보니 경제력에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국민당이 거주했던 도시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산업시설이 모두 파괴했다. 즉, 공산당은 제2차 세게대전이 끝나자 마자 만주에서 일본이 버리고 간 공장 등에서 무기 등을 생산하거나 일본이 사용한 무기를 갖고 국민당과 싸울 수 있었다.

공산당의 토지 개혁

공산당은 소작농, 빈농 등에게 지주로부터 토지를 빼앗아 나눠주는 방식의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이는 지주를 살해하거나 토지를 강제로 빼앗는 방식이었다. 소작농, 빈농 등에게 지주를 살해하고 토지를 강제로 빼앗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다보니 만약 국민당이 해당 지역을 재장악할 경우 소작농이나 빈농 등은 죽은 목숨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공산당에 열심히 협조를 하는 것은 당연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