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분한 주민들이
이같은 사태가 발생하자 격분한 주민들이 인근 일본인들의 주택, 학교에 불을 질렀다. 일본은 철저한 초강경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 이에 주민들의 검거가 시작됐고 이에 반발해서 2차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그러자 일본 육군은 만세시위 주동자를 색출한다면서 주민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수촌리를 찾았고, 이 중에는 영국계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도 있었다. 일본 육군은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육군 헌병중위가 지휘하던 부대를 제암리로 보내 만세시위운동 주모자를 색출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아리타 중위는 15세 이상 남자들을 모두 교회당에 모이게 했는데 명분은 “너무 심한 매질을 한 걸 사과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아리타 중위가 교회당에 나서자 일본군은 교회당에 사격을 시작했고,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이로 인해 민가 28채가 소실됐다.참혹한 현장
19명은 교회당 안에서 사망했고, 3명은 교회당에서 탈출하던 중 2명은 사망했고, 1명만 겨우 목숨을 건졌다. 가족을 찾아 교회로 달려온 부인 2명을 죽이기도 했다. 이후 고주리에서 일가족 6명을 살해했다. 스코필드는 제암리에서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황을 파악하고 세상에 알렸다. 스코필드는 ‘꺼지지 않는 불꽃(Unquenchable Fire)’이라는 보고서를 저술해 전 세계에 제암리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을 폭로했다. 이같은 소식이 국제사회에 알려지자 일본은 아리타 중위에게 30일 중근신 처분을 내렸다. 이후 조직적으로 은폐했다. 해방 이전까지는 제암리 사건에 대해 꺼내지 못했다가 해방이 되면서 제암리 사건이 재조명됐다.일본 내에서도
일본은 패망 이후 학살 사건을 거의 잊었지만 1965년 일본 개신교계 인사들이 한국을 방문하면서 유일한 생존자였던 전동례 할머니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귀국 후 ‘제암교회 소타(焼打)사건 속죄 위원회’를 조직하고 일본 개신교인들의 속죄헌금을 모금했다. 그렇게 일본 개신교계에서는 반성과 사죄를 위한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1990년대 중반 제암교회 재복원 사업이 시작됐다. 1997년에 문화재관리국 주도로 제암교회 복원 및 새로운 3.1운동 순국유적기념관 건축 사업이 추진됐다. 그리고 2001년 3월 1일에 완공됐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