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48년 5월 10일은 제헌 국회 국회의원을 뽑는 5.10 총선거가 실시된 날이다. 투표율은 95,5%를 기록했으며, 한국사에서 최초로 다장제를 정착한 사례이면서 최초로 민주적 방식으로 공직자를 선출한 사례이다. 원래 국회의원 임기는 4년이었지만 제헌 국회의원들에 한해 2년 임기였다.
광복 맞이했지만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것은 냉전의 도래와 남북 분단의 시작이었다.
1945년 8월 8일 소련군이 일본제국에 선전포를 하면서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을 개했고, 한반도 진공을 개시했다.
소련군의 진공 속도에 놀란 미국은 8월 13일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소련군의 한반도 전역 점령을 막기 위해 북위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확정하면서 소련에 통고했다.
소련군은 그해 8월 21일 원산에 상륙했고, 평양에 소련군사령부와 소비에트 민정청을 설치했다. 그해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해서 조선총독부의 항복을 받고 군정을 시작했다.
그해 12월 16일부터 27일까지 모스크바 3상회의를 개최했는데 미국, 영국, 소련 등 3개국은 한반도 내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쟁점으로 논의했다. 그리고 중국까지 포함한 4개국이 최장 5년 동안 한반도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결정에 합의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신탁통치’만 강조하는 언론보도와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이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는 오보가 터지면서 신탁통치 반대와 함께 좌우로 나뉘어 이념대립이 심화됐다.
혼란스런 미군정 시기
1946년 1월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가 설치됐다. 하지만 제대로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면서 결국 그해 6월 3일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선언하게 됐다. 이때 김구의 한국독립당,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등을 비롯해 모든 정치 세력이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지만 한민당만 ‘찬성’했다.
그러자 미국은 여운형과 김규식을 지지하면서 ‘좌우합작운동’에 간접적으로 지원해줬다. 이에 극우파 한민당+이승만과 극좌파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좌우합작운동에 반대했다. 그런데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미국 국무부는 ‘반공주의’ 노선으로 선회하게 됐고, 좌우합작운동 지지를 철회했다.
이런 가운데 여운형이 1947년 7월 19일 암살당하면서 좌우합작운동은 사실상 유명무실됐다. 그리고 미소공동위원회가 최종 결렬되면서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했고, 그해 9월 23일 유엔 총회 본회의에 한반도 문제가 회부됐다.
미국은 유엔 감시 하에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총선거를 실시한 후 정부 수립과 함께 미소 양국군이 동시에 철수 등을 제안했지만 소련은 미소 양국군을 먼저 동시에 철수하고 남북한 대표단을 만드는 방안을 제시했다.
결국 미국의 의도대로 1948년 3월 31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한국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5월 10일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됐고, 95.,5% 투표율을 기록했다. 제주도를 제외한 38선 이남 지역에서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55명을 당선시켰고 한국민주당은 무소속 출마를 포함해 30여 명을 당선시켰다. 다만 무소속이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
그리고 제헌국회는 7월 17일 헌법을 제정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유엔총회에서는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 내에서 선출된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결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