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63년 10월 11일은 프랑스 샹송 여왕 에디트 피아프가 사망한 날이다. 프랑스 국민가수이면서 프랑스 대중가요 역사상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본명은 에디트 지오바나 가시옹(Édith Giovanna Gassion)이다. 가난한 서커스 단원 아버지와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서커스 단원이기 때문에 자신의 어머니에게 에디티를 맡겼다. 어린 나이에 백내장에 걸려 실명 위기에 놓였지만 7살에 겨우 회복됐다. 그만큼 열악한 환경이어서 키는 142cm에 불과했고, 이것이 피아프(piaf), 참새라는 뜻의 그의 별명의 유래가 됐다.
14살 때부터
14살 때부터 에디트 피아프는 아버지 따라 유랑하면소 노래를 했고, 생활비를 벌었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부르는 노래는 묘하게 사람을 이끌었다고 한다.
17살에 첫아이인 딸 마르셀(Marcelle)을 출산했지만 아이는 2살의 나이로 뇌수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충격에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에디트 피아프의 소문을 들은 럽 르 제르니의 대표 루이 루플레라는 인물이 그에게 주급이 보장되는 자리를 제안했지만, 그가 얼마 뒤 살해당하면서 피아프가 감옥에 갇히게 되지만 곧 진범이 잡혀서 풀려났다. 하지만 그 사이 명성이 퍼지면서 노래로 자립을 할 수 있게 됐다.
성공은 했지만 교통사고를 네 번이나 겪었고, 사랑했던 남자도 역시 비행기 사고로 떠나보내야 했다. ‘사랑의 찬가(Hymne à l'amour)’는 이때 충격을 받고 만든 노래이다.
말년도 불행
에디트 피아프는 말년도 관절염과 불면증으로 다량의 약물과 알코올로 연명해야 했다. 그러면서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았고, 1963년에는 30kg밖에 되지 않았다.
사망한 이후에는 나치 스파이 의혹을 받았다. 그 이유는 ‘사랑의 찬가’에 “당신을 위해서라면 조국도 친구도 버리겠다”는 가사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찬가는 수많은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가 되면서 오늘날까지도 부르는 샹송이 됐다.
사랑의 찬가는 일종의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웨이’와 비슷한 성격이면서 ‘프랑스의 마이웨이’라는 별명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