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인문학은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다.
그동안 상경계나 이과 등의 과감한 투자 등으로 인해 성장을 거듭해 왔지만 인문학의 성장은 이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이번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인문사회과학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인문학에 대한 충분한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인문학의 위기
우리나라 인문학의 위기는 ‘비생산적인’ 것을 넘어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는데 실패하면서 ‘투자는 낭비’라는 인식을 갖게 만들었다.
흔히 인문학 투자를 호소할 때 인문학은 경영활동에 도움이 된다는 식의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즉, 경영활동을 위해서는 인문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식으로 ‘보조 역할’을 내세우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는 계량화된 기준이 없기 때문에 나타났다. 이공계에서는 객관적인 학술성과 지표가 있지만 인문학은 객관적인 학술성이나 지표가 없다. 예컨대 이공계는 저널에 눈문을 얼마나 많이 게재했느냐를 갖고 평가를 하지만 인문학은 이런 평가가 없다. 즉, 인문학에 투자를 하고 싶어도 ‘산출되는 결과물’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문학계 스스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연구 성과물에 대해서도 외부로 표출하는 경향이 이공계에 비하면 낮다. 그것은 인문학 가치를 인문학계 스스로 입증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 된다.
인문학계 스스로가 인문학을 비하하게 되면서 투자 요인을 만들어 내지 못하면서 인문학 위기를 초래하게 만들었다.
그들만의 카르텔
게다가 인문학은 다른 학계보다는 외부와의 교류가 낮다. 이공계는 끊임없이 해외 석학들과의 교류 등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지만 인문학은 스스로를 가둬놓고 그것이 ‘인문학’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즉, 인문학이 스스로 바깥 세상에 과감하게 개방을 해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문학상’이다. 우리나라 문학상 중 일부는 카르텔이 형성돼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어느 대학 누구 교수에게 학문을 배웠느냐에 따라 ‘수상’ 메달 색깔이 달라진다는 소문이 있다.
그것은 결국 인문학의 폐쇄성을 만들어 버린다. 따라서 인문학이 새로운 성장과 발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답습하고 폐쇄적이 된다. 그것은 결국 일반 국민들과의 소통이 되지 않으면서 인문학은 ‘그들 만의 리그’가 되는 것이다.
또는 때로는 스스로가 ‘문송’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스스로 ‘가둬버린다’. 그리고 세상과 소통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AI 기술을 넘어 4차 산업혁명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현재 인문학은 가장 중요한 학문인데 스스로 과거에 갇혀 제대로 된 인문학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