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12.3 비상계엄 그리고 영국 내란
[오늘 통한 과거리뷰] 12.3 비상계엄 그리고 영국 내란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4.12.19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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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1세./반 다이크 1638년 작
찰스1세./반 다이크 1638년 작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2.3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볼 것인지 여부를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측은 내란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석동현 변호사는 윤 대통령의 내란죄 혐의는 성립 요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석 변호사는 지난 17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대통령이 야당의 국정 방해 발목잡기에 시달려왔다면서 ‘홧김에 해보자’의 감정적 상황을 넘어 계엄을 했다면서 경고성 계엄이라고 주장했다. 윤 대통령 역시 2시간 짜리 내란이 어딨냐라면서 내란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찰스1세 vs 의회

12.3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판단할 것이냐를 두고 마치 ‘왕당파’와 ‘의회파’의 갈등을 보인 영국의 내란 사태가 떠오른다는 영국인들이 많다.

영국 내란 사태는 1642년~1651년 찰스 1세를 중심으로 한 왕당파와 크롬웰이 주도한 의회파의 내전을 의미한다.

1628년 영국 의회는 찰스 1세를 상대로 권리청원을 제시했다. 즉, 의회의 동의를 받지 않고 결코 과세를 할 수 없고, 전시가 아니면 계엄령을 발동해 군법으로 민간인을 처벌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을 담은 것이다.

이를 승인했다. 찰스 1세는 당시 스페인과 전쟁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이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권리청원 1년 후 의회를 해산해 버렸고, 전쟁법을 발동해 군사 재판을 일삼았다.

그런데 1641년 아일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왕비는 네덜란드로 피신했다. 하지만 의회는 찰스 1세의 폭정을 언급하면서 반발했다. 이에 찰스 1세는 다시 의회를 해산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왕당파와 의회파의 갈등은 더욱 고조됐고, 결국 내란에 들어갔다.

찰스1세 처형한 크롬웰

초반에는 왕당파가 우세한 듯 보였지만 크롬웰이 출현하면서 전세가 역전됐다. 결국 찰스 1세는 의회파에 의해 붙잡혔고, 처형당했다. 그러면서 군주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됐다.

다만 왕당파 잔존세력이 남아 계속해서 찰스 2세를 왕위에 올리려고 했다. 그러면서 왕당파 세력은 콘월의 실리 제도에 자리를 잡고 영국과 협력관계에 있던 네덜란드는 왕당파 해군에게 1651년 3월 선전포고를 했다. 하지만 교전 자체는 일어나지 않았고 2개월 후 왕당파 함대가 스스로 항복을 했다.

335년인 1986년 실리 제도의 자치 의회 의장과 네덜란드 측이 정식으로 종전하는 조약을 맺으면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전쟁을 한 것으로 기록됐다.

의회파가 승리를 하면서 크롬웰은 영국 상업을 보호하기 위해 ‘항해법’을 만들었고, 영국 배나 물건을 생산한 나라의 배로만 무역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해운업과 조선업이 크게 발전하게 되면서 영국이 해양국가로 우뚝 설 수 있게 됐다.

다만 크롬웰이 지나치게 청교도 정신을 강요한 것에 대해 영국 국민들이 싫어했다. 이것이 오히려 왕정복고를 이뤄내게 됐고, 찰스2세가 왕위에 오르게 됐다. 다만 명예혁명을 이뤄내면서 영국은 입헌군주제 국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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