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12월 12일 12.12 군사반란
[역사속 오늘리뷰] 12월 12일 12.12 군사반란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4.12.12 08: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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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79년 12월 12일은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난 날이다. 육군 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의 우두머리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주도한 신군부느이 군사 쿠데타로 전두환 정권이 탄생되는 초석이 됐다. 대법원에서 ‘군사반란’으로 정의가 되면서 ‘12.12 군사반란’이 정식 명칭이다. 다만 최근에도 12.12 사태라고 부른다.

뿌리 깊이 내린 하나회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바로 쿠데타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5.16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군대 내 사조직을 만들었고, 그 사조직을 전두환에게 맡겼다. 이에 하나회가 군대 내 뿌리 깊게 내려앉았다. 이런 이유로 12.12 군사반란이 하나회에 의해 성공할 수 있었다. 반란 당시 특전사 수도권 4개 여단 중 3개 여단의 여단장이 전두환의 명령에 따랐다. 당시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전두환과 하나회의 위협을 알기 때문에 전두환을 군에서 축출하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다만 정승화 사령관이나 진압군 측에 있었던 인사들이 하나회가 얼마나 군에 뿌리 깊게 박혀 있었는지를 몰랐다. 진압군으로 나섰던 장태완 수경사령관도 진압에 나서려고 해도 제대로 나서지 못했던 것도 자신의 부대에 뿌리 내린 하나회 조직 때문이다.

보안사가 통신망 장악

전두환이 12.12 군사반란을 성공으로 이끈 또 하나의 원인은 국군보안사령부가 모든 통신망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모든 정보가 각 부대에 소속된 보안부대에 속속 전달됐고, 하나회 소속 인사들에게 보고가 됐다. 즉, 진압군이 어느 방향으로 어떤 식으로 진격하는지 등의 정보를 알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회 소속 인사들이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게다가 특전사령부, 수도경비사령부, 대통령 경호실 등 주요 부대의 대다수를 하나회가 장악하고 있었다. 즉, 진압군이 진압에 나서려고 해도 휘하 부대원들이 명령거부를 한 것이다. 여기에 진압군 수뇌부 역시 우왕좌왕했다. 그러면서 확전을 우려해 반란군에 굴복했다. 물론 장태완 사령관 등이 끝까지 저항을 하려고 했지만 역시 하나회에 의해 무력화되면서 좌절됐다. 진압군이 주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북한의 동향 때문이다. 우리나라 군사력이 북한의 군사력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은 1990년대 이후이다. 즉,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났을 때는 우리 군사력이 북한의 군사력보다 뒤쳐졌다. 그런데 하나회가 전방의 부대까지 서울로 빼냈다는 것 자체는 진압군에게 부담이 된다. 만약 덩달아 전방 부대를 빼내서 반란군을 진압하려고 했다면 전방의 군사력이 비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진압군이 전방 부대를 빼내서 진압을 했다면 내전이 되는 것이고, 그로 인한 서울시민의 피해가 막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진압군은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 하나회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역사적 단죄 제대로 못해

전두환과 노태우 등은 그 이후 승승장구하면서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리고 하나회 소속 인사들은 모두 영전을 했다. 물론 김영삼 정부 들어서면서 12.12 군사반란 단되하는 재판이 진행돼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곧바로 사면이 되면서 12.12 군사반란에 대한 역사적 단죄가 미완성으로 끝났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12.12 군사반란을 옹호하는 세력이 세상 밖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만약 제대로 된 역사적 단죄를 했다면 12.12 군사반란에 대해 옹호하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여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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