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마녀사업이라고 부른 마녀사냥
[역사속 경제리뷰] 마녀사업이라고 부른 마녀사냥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2.28 09: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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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흔히 마녀사냥하면 여자가 묶여 있고, 불에 타죽는 것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마녀사냥’ 혹은 ‘마녀재판’이라는 것은 올바른 번역이 아니고 ‘이단재판’이라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기도 하다.

이런 마녀사냥이 ‘마녀사냥’이 아닌 ‘마녀사업’으로 불리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름 짭짤한 돈벌이가 됐기 때문이다.

신교와 구교가 부딪히는 근세시대에 ‘돈벌이’가 합쳐지면서 마녀사냥은 ‘마녀사업’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신교와 구교의 갈등

근세시대 들어오면서 프로테스탄트 즉 신교가 급속도로 전파되면서 구교 즉 카톨릭교도와의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이러다보니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이단이라고 주장하면서 그에 따른 ‘이단재판’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즉, 마녀사냥이기보다는 종교재판의 성격이 강했고, 카톨릭을 믿는 지역에서 신교도는 ‘이단’에 해당했고, 그렇기 때문에 이단재판을 열어서 처형을 했고, 신교를 믿는 지역에서 카톨릭 신자는 이단으로 처형을 받았다.

마녀사냥이 마녀사업으로

그러나 이런 종교적 갈등도 있었지만 마녀사냥은 주로 마녀사업이었다. 이단재판에서 이단이라고 자백을 받으면 규정에 따라 그 사람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었다. 이러니 죽기 직전까지 고문을 해서 자백을 받아내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자백을 받아서 몰수한 재산은 영주·교주·이단 심문관 등에 배분됐고, 이단 용의자를 이단이라고 지목한 사람에게도 그 몫이 돌아갔다.

그러다보니 앙심을 품은 사람이 누명을 씌우게 해서 죽이고, 그 재산을 빼앗아 가는 것이 비일비재했다.

초기에는 남성이었지만 점차 타켓을 힘없는 여성으로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단재판’도 ‘마녀재판’으로 변질됐다. 마녀 혐의자를 체포하고 마녀재판을 회부한 후 재판을 통해 고문을 가해서 자백을 얻어낸 후 화형에 처한다. 그리고 마녀 용의자가 사망하면 최후에는 전재산을 몰수한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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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많은 늙은 과부가 타켓

이런 이유로 주요 타켓은 돈 많은 과부이다. 남편이 없는 여자이기 때문에 그 마을에서 보호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짝사랑하는 여성이 프로포즈를 거절한 것에 앙심을 품어서 마녀사냥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주로 돈 많은 과부를 택했다.

그러지 않으면 의사와 라이벌 관계에 있던 산파나 약초 지식을 가지고 있던 여자이다. 산파나 약초 지식을 가진 여성을 마녀로 죽여야 의사인 자신이 돈을 더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마녀사냥이 초창기에는 젊은 여성들도 마녀 용의자로 삼았지만 재판관들은 젊은 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무죄 방면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래야만 마을의 인구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점차 마녀사냥의 희생양은 늙고 돈 많은 여성이 됐다.

그러다보니 마녀의 이미지가 주로 늙고 메부리코에 솥에 온갖 약초를 넣어서 큰 숟가락으로 휘젓는 그런 이미지로 굳어지게 됐다. 즉, 늙은 과부인데다 약초 지식을 가진 여성을 마녀로 지목하다보니 이미지가 그렇게 굳어지게 된 것이다.

사업과 통치 이유로

마녀사냥이 근세 들어와서 횡행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중세를 넘어서면서 외부와의 교류가 점차 빈번해지면서 통치자는 지역민을 효과적으로 통치를 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이단재판이 정치적 재판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즉, 사업적인 측면과 정치적인 측면이 합쳐지면서 마녀사냥이 횡행하게 된 것이다. 마을 통치자로서는 지역민을 효과적으로 통치하는 방법으로 마녀사냥을 이용했다.

또한 마을 주민들 입장에서는 ‘볼만한 구경거리(?)’가 생기게 됐다. 마녀로 지목된 사람들 대부분이 지역 하층민이기 때문에 마을 주민들은 그녀들에 대해 동정을 하지 않았다.

여성을 발가벗겨서 고문하고, 그리고 화형에 처한다는 것은 마을 주민 입장에서는 엄청난 구경거리(?)였다. 물론 잔혹한 구경거리이지만...

로마시대 ‘검투사들의 싸움’과 같이 그냥 구경거리 취급을 하게 된 것이다. 통치자 입장에서 마을 주민들을 모아서 구경거리를 만들어주면서 주민을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게 됐고, 영주나 성직자 그리고 마녀 용의자를 지목한 사람은 돈벌이가 되니 그만큼 일석이조(?)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마녀사냥에 대해 근세 유럽은 관대했다.

마녀사냥은 미친 짓

그러다가 점차 사회가 발전하고 성장하면서 마녀사냥이 미친 짓이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독일에서는 마녀 용의자를 지목한 사람에게 마녀 용의자가 사망한 후 재산을 나눠주는 것을 금지하기 시작하면서 마녀사냥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구교와 신교의 갈등이 점차 안정화되면서 종교적 갈등 역시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마녀사냥도 줄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강력한 중앙집권식 왕정국가가 탄생하면서 더 이상 마녀사냥을 용납하지 않는 왕들이 나타나면서 마녀사냥이 점차 줄어들었다.

그리고 2003년 요한 바오로 2세는 마녀사냥을 교회의 잘못으로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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