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청와대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그 공무를 수행하는 ‘대통령 집무실’과 퇴근 후 기거하는 ‘대통령 관저’를 말한다. 아울러 대통령을 보좌하는 비서진과 공무원들이 근무하는 장소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대통령 집무실을 서울 용산 국방부 신청사로 이전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청와대 이전 이슈가 급부상됐다.
김은혜 당선인 대변인은 “윤 당선인이 기존 청와대로 들어갈 가능성은 제로”라며 “확실한 것은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 청와대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다. 현 청와대는 경복궁 후원 자리에 있다.
고려시대로 거슬러
청와대 터의 기원은 고려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선비기’에 따르면 고려 수도 송악(개성)은 그 기운을 삼각산 즉 한양에 빼앗긴다고 했다.
이에 고려 숙종 때 한양을 남경으로 삼는 천도론이 나왔다. 이에 남경 궁궐이 1104년 완성됐다. 하지만 천도는 논의만 이뤄졌을 뿐 흐지부지 끝났다.
그러면서 남경 궁궐터가 남았는데 그 남경 궁궐터가 조선시대 경복궁 후원이었고, 그곳이 현재 청와대이다.
조선시대 들어오면서 도읍을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경복궁을 창건했다. 원래 남경 궁궐터에 지으려고 했지만 터가 협소하면서 더 남쪽에 자리를 잡고 남경 궁궐터는 경복궁 후원이 됐다.
그러면서 경복궁 후원은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면서 소실됐고, 한동안 방치를 했다.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창덕궁 춘당대(春塘臺)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데 바로 경복궁 경무대(景武臺)이다.
즉 경무대는 조선시대부터 있던 이름으로 경복궁 후원에 있던 넓은 터의 이름이다. 넓은 터와 함께 몇몇 전각들이 있었다. 이 넓은 터에서 왕의 참석 하에 과거 시험을 치르거나 권농, 연무 등이 행해지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총독 관저 부지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전각들을 헐고 공원부지로 만들었다. 1937년 해당 지역을 조선총독부 조선 총독 관저 부지로 선정하면서 관저를 세웠느넫 지방은 보천교 본당이던 십일전(十一殿)의 청기와를 가져왔다. 그래서 관저 지붕이 푸른색이었다.
해방 이후 미군정 치하에서 미군정 사령관인 미합중국 육군 중장 존 하지 장군의 관저로 사용하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관저로 사용하게 됐고, 경무대로 부르게 됐다.
4.19혁명 이후 자유당 정권에 대한 반감의식이 팽배해지면서 경무대라는 이름에 대한 거부감이 파다했다.
이에 당시 서울시사 편찬위원이던 김영상이 윤보선 대통령에게 ‘화령대’와 ‘청와대’의 두 가지 안을 제시했다. 윤보선 대통령은 백악관과 대조되는 의미로 ‘청와대’를 선택했다.
박정희 대통령 당시 청와대를 ‘황와대’로 바꾸자는 의견이 제시됐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바꿀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총독부 관저로 지어진 건물이었기 때문에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기 협소하고 노후화됐다면서 재건축 요구가 이승만·윤보선 정권 때 있었지만 손을 대지 않았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개보수·증축했다. 그리고 전두환 시절 청와대 구본관을 리모델링했고, 노태우 시절 본관과 관저, 프레스센터인 춘추관을 신축하면서 오늘날 모습을 갖췄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3년 취임하자 구 본관을 일제 잔재라는 이유로 전부 철거했다. 그리고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을 시민들에게 개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