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을 중심으로
고위 관료들의 사는 곳
한양으로 천도를 하면서 고위 관료들 역시 송악(개성)에서 한양으로 사는 곳을 이사해야 했다. 고위 관료들은 경복궁이나 6조 관청으로의 출퇴근이 쉬워야 했다. 따라서 광화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대궐 같은 기와집을 마련해야 했다. 현재 북촌이나 청운동 등에 기와집이 많은 이유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북촌이라고 부른 이유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청계천 남쪽을 ‘남촌’이라고 불렀고, 주로 하위 관리나 몰락한 양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선비들이 거주했다. 중촌은 청계천 주변을 이야기하며 중인들이 거주했다. 왕은 제사를 지내는데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토지와 곡식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를 합쳐 종묘사직이라고 불렀다. 이런 이유로 광화문에서 남산을 바라볼 때 왼쪽에 종묘를 만들었다. 현재 종묘에는 조선시대 왕들의 위패가 모셔졌다. 그리고 남산을 바라볼 때 오른쪽에 사직이 만들어졌다. 오늘날 사직동이 나오게 된 유래이다.성균관 그리고 반촌
조선시대는 유학을 숭상했기 때문에 성균관이 가장 중요했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성균관대학교에 성균관을 차렸다. 그리고 성균관 유생들에게 좋은 것만 먹이고 좋은 것만 입히고 싶었다. 이런 이유로 반촌이 생겨났다. 반촌은 성균관 유생들을 위한 천민집단 거주지이다. 또한 조선시대는 농사에 필요한 소를 도축하는 것을 금하면서 소고기를 먹는 것을 금했는데 유일하게 성균관 유생들에게는 소고기를 먹이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면서 전국에 있는 소가 성균관 근처로 모여서 도축이 됐는데 그것이 오늘날 마장동이 됐다. 이처럼 한양은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도시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런 계획도시의 모습이 사라지게 됐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6조 거리에서 6조 관청이 사라지게 되면서 상당히 넓은 거리가 탄생됐다. 그것이 오늘날 현재 광화문 광장이 된 것이다. 그것은 해방 이후 산업화 되면서 과거 한양의 계획도시 모습은 이제 흔적으로나마 찾아봐야 하는 상황이 됐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