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4월 8일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 발생
[역사속 오늘리뷰] 4월 8일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 발생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4.08 0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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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서울특별시 소방재난본부
사진=서울특별시 소방재난본부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70년 4월 8일은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 사건이 발생했다. 와우아파트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전동 산 1번지에 세워진 아파트였다. 1960년대후반부터 서울의 인구수가 급증하면서 여러 이주 대책과 아파트 건립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그것은 무허가 불걍건물 속칭 ‘판자촌’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 입장에서는 판자촌이 보기에 불편했고, 이런 이유로 판자촌을 없애기 위한 특단의 대책으로 경기도 광주군(현 경기도 성남시)로 강제 이주를 시키거나 시민아파트를 건립해서 이주하게 했다.
사진=서울특별시 소방재난본부
사진=서울특별시 소방재난본부

대대적 시민아파트 건립 계획

이에 1968년 12월 3일 대대적인 시민아파트 건립 계획을 발표하고 1969년 1년 동안 32개 지구에 406동 1만 5천840가구 분의 아파트를 건립한다. 아우아파트는 서울시가 와우산 일대에 건설한 시민아파트이다. 대룡건설이 가파른 산중턱에 와우아파트를 지었는데 당시 김현욱 시장이 자신의 업적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이다. 문제는 대룡건설이 건설 허가를 따내기 위해 뇌물을 썼고, 비용을 아끼기 위해 공사자재를 아껴야 했다. 이에 철근 70개를 넣어야 할 기둥에 고작 5개의 철근을 넣을 정도로 부실공사를 했다.

사망 33명, 부상 38명

1970년 4월 8일 오전 6시 40분께 아파트 한동이 무너지면서 사망 33명, 부상 38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또한 무너진 아파트 잔해가 아파트 아래에 있던 판잣집을 덮쳐 판잣집에서 잠을 자고 있던 1명이 사망했고, 2명은 부상을 입었다. 와우아파트는 1969년 6월 26일 착공해 6개월만인 12월 26일 준공된 아파트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철근도 부실하게 투입했을 뿐만 이나라 다른 것도 부실하게 투입했다. 그러다보니 설계강 건물 하중은 m2당 280㎏인데 무너진 15동의 실제 하중은 900㎏으로 m2당 600㎏ 이상 초과됐다. 또한 콘크리트 배합 비율이 엉망이어서 시멘트는 넣는 시늉만 했고, 콘크리트라기보다는 모래와 자갈의 반죽에 가까웠다. 반죽할 때 불순물이 많은 하수도 물을 사용하면서 해빙기인 4월 지층이 내려앉아 건물이 무너졌다.
사진=서울특별시 소방재난본부
사진=서울특별시 소방재난본부

와우아파트 참사는 잊혀지고

해당 사고가 발생하자 김현욱 시장은 서울시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관련자들은 구속됐다. 정부는 부랴부랴 이전까지 지어진 시민아파트의 안전도를 점검했고, 총 대상 405동 중 349동이 안전 기준에 미치지 못해 보수를 받아야 한다는 충격적인 실태가 드러났다. 시민아파트가 얼마나 허술하게 지어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문제는 이같은 사고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실공사 관행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이에 1990년대에 일어난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로 이어졌고 올해에는 광주 현대산업개발 아파트 붕괴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와우아파트 무너진 지 50여년이 훌쩍 넘었지만 부실공사 관행은 계속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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