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방송에서는
1990년대는 문화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1980년대 3저 호황과 중동건설 붐으로 인해 아이들은 주머니가 넉넉했고, 아버지가 외국에서 가져온 비디오 테잎를 통해 다른 나라의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특히 미국 문화가 아닌 유럽 문화를 비디오 테잎을 통해 접할 수 있게 되면서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된 1990년대에는 문화 르네상스를 열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방송가는 트로트나 발라드가 주류를 이뤘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92년 4월 11일 임백천이 진행했던 MBC ‘특종! TV연예’ 첫 회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출연했다. 당시 패널은 혹평을 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혹평보다는 미지근한 반응이 더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당시 방송 주류는 트로트나 발라드였기 때문이다. 방송가 입장에서는 트로트나 발라드 신인가수를 발굴해야 하는데 한국에서 생소한 랩이라는 것을 갖고 온 서태지와 아이들이기 때문에 탐탁치 않은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은 불과 몇 개월 만에 문화 대통령으로 성장했다.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는 신드롬을 넘어 대통령이라는 칭호까지 내리게 만들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하면서 한국 가요계는 성인가요와 발라드 위주에서 10대 취향의 댄스음악으로 재편됐다. 그때까지 대중음악이 소비하는 계층은 ‘중장년층’이었다. 그들이 테이프를 구매할 수 있는 소비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10대들이 테이프를 구매하는데 주저함이 사라졌다. 그러면서 가요계는 중장년층 위주에서 빠르게 10대 위주로 바뀌게 됐다.새로운 장르의 도전
서태지와 아이들은 새로운 실험도전을 많이 했다. 1집이 랩을 했다면 2집 하여가는 최초로 국악과 흑인음악, 헤비메탈이 접목됐고, 3집은 랩 메탈, 4집은 갱스터 랩 등을 구사했다. 이런 새로운 도전 정신이 10대·20대와 맞물리면서 새로운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이른바 X세대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물론 X세대는 미국에서 탄생했지만 1990년대 우리나라에 도입하면서 X세대라는 말이 나왔다. 기성세대와는 다른 세대라는 의미인데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X세대라는 말이 어떤 말인지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나왔을 정도다. 이는 기성세대가 수직적 문화에 기반을 했다면 X세대는 수평적 문화에 기반을 둔 사람들이다. 이런 이유로 기존의 전통이나 습관 등에 대해 거부를 하기도 했다. 이는 기존의 체제에 억눌러있던 당시 청춘들을 폭발하게 만든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난 알아요’는 그런 역할을 했던 노래이다.방송국과의 관계 설정 나서
20세기는 기획사 사장과 방송사 PD가 황제로 군림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음악을 만들고 춤을 개발해 유행시켰다. 1집 성공 이후 스스로 소속사를 만들어 활동했으며, 방송국, 언론, 음반업계의 관행에 저항을 했다. 기존의 음반시장의 구조를 깨버리고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당시 방송국의 힘이 얼마나 강력했나 하면 복장 규제를 했고, 코미디 프로그램에도 출연을 강제했다. 하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은 복장 규제를 하거나 코미디 프로그램 출연을 강제하면 안나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가수들이 점차 자유로운 일정을 잡을 수 있게 됐다. 또한 활동 후 공백기를 갖고 다시 컴백하는 시스템을 만들면서 현재 아이돌 활동 패턴을 만들어 냈다. 기존 가수들은 한번 신곡을 내면 몇 년 동안 쉬지 않고 활동을 해야 했다. 왜냐하면 가수들이 활동을 중단하면 방송가에서 방송 출연을 하지 않게 되고, 신문 등에도 기사로 나오지 않게 되면서 사실상 증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태지와 아이들은 앨범 활동을 잠깐 하고 휴식기를 갖고 컴백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휴식기를 갖고 컴백을 해도 수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물론 일각에서는 ‘신비주의 전략’이라고 묘사했지만 사실상 오늘날과 같은 아이돌의 창작활동 패턴을 만든 것이다.기성세대와의 갈등
서태지와 아이들은 3집부터 단순히 음악적인 부분을 넘어 사회문제를 담기 시작했다. 통일을 염원한 ‘발해를 꿈꾸며’, 대한민국 교육 현실을 강하게 비판한 ‘교실 이데아’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더불어 치마패션 등을 만들었는데 그로 인해 방송 금지까지 당해야 했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팬덤을 만들었고, 그 팬덤 문화가 오늘날 아이돌 팬덤 문화가 되게 했다. 4집의 경우 ‘Come Back Home’은 그 곡을 듣고 가출했던 청소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뉴스가 나올 정도이다. 이같은 행동에 당시 언론은 서태지와 아이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교실 이데아 같은 경우 거꾸로 들으면 ‘피가 모자라’ 등이 들린다면서 악마화를 하기도 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