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5월 3일 인천 5.3운동
[역사속 오늘리뷰] 5월 3일 인천 5.3운동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5.03 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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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86년 5월 3일은 인천 5.3운동이 발생한 날이다. 인천직할시(현 광역시)에서 벌어진 민주화운동으로 다음해 6월 항쟁의 불씨가 된 사건이다.

당시 직선제를 추구하는 것은 다같은 목표였지만 기존 보수 야당과는 행보를 달리하면서 결국 기존 보수 야당과 결별을 하고 진보 정당의 출현의 태동이 되는 사건이기도 했다.

87년 대선 당시 4자 필승론 가운데 진보 정당에서도 대선 후보를 냈고, 이것이 훗날 진보 정당의 출현으로 이어졌고, 오늘날 정의당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분신 자살 계기로

1986년은 직선제 개헌 열망이 최고조로 달한 때이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이 이른바 체육관 선거를 통해 차기 후계자를 지목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으면서 보수 야당과 운동권 세력은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 들어갔다.

1985년 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이 돌풍을 일으켰고, 이 기세를 몰아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다.

그 요구에 운동권이 합류를 하면서 불길은 거세지기 싲가했다. 그리고 1986녀 4월 28일 서울 신림사거리에서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전방입소반대시위에서 분신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김대중과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주화를 위한 국민연락기구(민국련) 회의’에서 소수 학생들의 반미, 용공, 과격 시위는 반대한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4월 30일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개헌 논의를 수용하는 대신 신한민주당이 가두서명시위를 그만둔다고 합의하고 신민당도 좌익학생들을 단호시 다스려야 하며 민주화운동에 이런 사람들이 끼어서는 안된다고 발언을 했다.

해당 발언이 공개되면서 재야민주화운동세력의 연합조직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 보수대야합이라면서 신민당을 강력하게 비난하고 민국련에서 탈퇴했다. 그러면서 노동자, 학생 등 운동권에서 5월 3일 인천에서 열리는 개헌추진 결성대회에 집중 참여한다고 결정한다.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다양한 목소리가 한꺼번에 분출

5월 3일 자민투(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 민민투(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 인노련(인천지역노동자연맹) 등 다양한 운동권이 결집됐고, 일반 시민들도 수만명 참가했다.

이를 계기로 다양한 목소리가 한꺼번에 분출됐다. 워낙 많은 집단들이 참가한 집회이기 때문이다.

공통의 목표는 직선제 개헌이었지만 직선제 개헌과 더불어 자신들이 속한 단체가 추구하는 이상과 이념 등등에 대한 구호도 난무했다.

워낙 지도부 없는 결집이다 보니 중구난방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시간이 갈수록 시위의 동력은 떨어지게 됐고,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이에 오후 5시부터 경찰의 대대적인 진압 작전이 시작됐고, 시위대는 바리게이트를 만들고 투석전을 진행했지만 강경진압이 시작됐고, 총 319명이 연행됐고, 129명이 소요죄로 구속됐다.

부천 성고문 사건 발생

이날 시위로 인해 서울과 인천 지역 운동권 지도부 60여 명이 지명수배를 받게 되면서 수도권 지역 운동권은 거의 몰락했다.

이 과정 속에서 6월 4일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발생했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도 해당 사건의 직간접적 영향을 받기도 했다. 따라서 6월 항쟁의 발단이 되기도 했다.

당시 구속된 사람들은 단식 투쟁 및 소음 등 격렬한 투쟁을 했고, 교도관들은 5.3 구속자들은 지독하다는 말을 남기기까지 했다.

당시 5.3운동 주동자 중 한 사람인 김문수 전 경기지사. 1985년 서울노동운동연합의 설립에 기여했으며, 1986년 김문수가 인천 5.3 운동으로 체포됐다.
당시 5.3운동 주동자 중 한 사람인 김문수 전 경기지사. 1985년 서울노동운동연합의 설립에 기여했으며, 인천 5.3 운동으로 체포됐다.

백기완 출마 그리고 민주노동당

5.3 운동 이전까지는 운동권과 보수야당은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다. 전두환 정권을 몰아내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운동권은 보수야당을 자신의 대변자로 생각하고 협력을 해왔다.

하지만 5.3운동을 전후로 신민당에서는 운동권을 과격 용공세력으로 규정했고, 운동권에서는 양김을 제도권 타협주의 세력으로 폄하했다.

서로가 가야 할 길이 다르다는 것을 5.3 운동 전후로 깨닫기 시작했다. 그것은 운동권이 자각하는 계기가 됐다. 기존 제도권 정치에 진보 세력이 진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때 ‘민중후보 백기완 선거운동본부’가 꾸려졌다.

그리고 운동권 세력은 점차 정치적으로 세력을 키워갔고, 국민승리 21을 거쳐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으로 이어졌다. 민주노동당이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오늘날 정의당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전두환 정권의 몰락과 노태우 정권에서 위기를 느꼈던 민주정의당(당시 여당)은 5.2운동을 계기로 보수 야당이 기존 운동권과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손을 뻗게 됐다.

하지만 초반에 양김이 호응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1990년 3월 노태우-김영삼-김종필로 이어지는 3당 합당이 실현됐다. 이 3당 합당이 실현된 계기가 된 것도 5.3운동 때문이라는 역사학자들의 평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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