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전남 신안군에는 하의도가 있다. 하의도는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44k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쾌속선으로는 1시간 10분 걸린다. 荷衣島는 섬의 형상이 연의 옷 즉 연꽃이 물에 떠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면적은 15km이고 해안선 길이는 40km이다.
하의도 하면 생소하다고 느껴질지 모르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섬이기도 하다. 하의도를 방문하면 평화로운 섬처럼 느껴지지만 340여년이라는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섬이기도 하다.
인조 때 정명공주에게
하의도의 농지탈환운동은 조선시대 인조 때로 올라간다. 선조의 딸 정명공주가 있었는데 인조가 정명공주에게 하의도 땅 24결을 절수했다.
하의도는 당시 토지가 개간되기 시작한 시점으로 양안(토지대장)에 제대로 올라가지 못한 토지 24결을 정명공주에게 절수한 것이다.
당시 왕실은 양안에 올라가지 않은 땅 즉 개간을 하지 않은 땅을 절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땅을 개간해서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게 해주기도 했다.
하의도 주민은 절수를 한 것은 ‘수조권’을 준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결세 수조권만 준 것은 1695년(숙종 21) 이후의 일이기 때문에 ‘수조권’이 아니라 ‘소유권’이라는 것이 정명공주와 그 후손들의 판단이다.
그런데 정명공주의 후손인 홍씨 가문(혜경궁 홍씨 가문)은 18세기초 경종 때 하의3도의 땅을 더 개간하면서 150여결에 이르게 된다. 초반에 절수한 토지는 24결이었는데 엄청나게 늘어나면서 민전(民田)에게도 도조를 받아가기 시작했다.
하의도 주민 입장에서는 나라에 세금을 내고, 다시 홍씨 가문에 세금을 내는 이중 과세이기 때문에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즉, 민전은 관에 전세(田稅)와 대동미를 납부하고 있었는데 홍씨 가문이 도조를 다시 거둬가면서 일토양세(一土兩稅)라면서 한성부에 송사를 냈지만 패소했다.
하의3도 토지 문제는 영조대에 조정에서 계속 문제가 됐지만 홍씨 가문의 세도로 인해 시정되지 못했다. 더욱이 혜경궁 홍씨 등 그야말로 홍씨 가문은 왕실의 친인척이기 때문에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다.
정조 때 승소
정조 때에 윤세민 등 하의도 주민 2명이 대표로 한양에 올라와서 신문고를 두들겼다. 그리고 국왕에게 직접 진정서를 올렸으며, 정조대왕은 도조 수취 금지의 어제문을 내렸다. 하지만 홍씨 일가가 윤세민 등을 무고로 걸었고 윤세민 등은 귀양을 가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조가 죽고 세도 정치로 들어서면서 홍씨 가문의 위세가 꺾이게 됐다. 이에 1870년 하의도 주민은 전라감사 이호준에게 24결 이외에 120결에 대해서는 도조를 하지 못하도록 했고, 24결에 대해서도 1결에 백미 20두씩만 수봉하도록 판결을 얻어냈다.
그러나 대한제국 시기인 1900년 궁내부 대장원경 이용익이 전국의 궁방전 관련 토지를 모두 색출해 내장원 소속으로 만들었는데 하의3도 땅 역시 내장원 소속이 됐다.
이용익이 실각하고 이완용이 득세하면서 홍씨 가문 사람이 하의3도 땅을 모두 차지하려는 욕심에 이완용에게 접근했고, 하의3도 땅 모두 홍씨 가문 소유라는 증명서를 받았다.
홍씨 가문 소유가 된 것을 알아버린 하의도 주민들은 홍씨 가문 사람인 홍우록을 상대로 1909년 부당이득반환청구소송을 경성지방법원에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즉, 하의도 땅에서 정부가 아닌 개인이 세금을 받아가는 도조는 부당이득이라면서 반환해달라는 소송을 냈지만 소송에서 패배한 것이다.
하지만 경성공소원은 하의3도 땅이 하의도 주민의 것인 것을 확인하고 홍우록에게 도민들에게 거둬간 도조를 반환하라고 판결했다.
그러자 홍우록은 조병택과 백인기에게 팔아넘겼고, 이들은 정병조에게 팔았으며 정병조는 일본인 우근권좌위문(右近權左衛門)에게 팔아 넘겼다.
일본인은 하의도 주민들이 재판을 걸게 되면 패소할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하의도 대표 중 한 사람이었던 박공진을 매수했다.
그리고 부당이득반환청구소송이 아닌 토지소유권 확인소송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하의도 주민들에게 서명을 받게 했다.
하의도 주민은 도조로 걷어간 돈에 대한 부당이득 반환을 하는 재판을 해야 하는데 토지소유권 확인 소송을 하게 되면 이미 여러 단계를 거쳤기 때문에 반환받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법원은 강제화해라는 결론을 내렸다. 강제화해는 토지 소유는 일본인에게 있고, 일본인이 토지 소작권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분노한 하의도 주민들은 일본인에게 협력한 박공진 등에 몰려가 집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결국 폭도로 몰리게 됐고, 하의도 땅은 일본인이 토지소유권자라는 강제화해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다른 일본인에게 넘기는 등 하의도 땅은 하의도 주민의 것이 아니었다. 결국 소송으로 하의도를 되찾는 것이 힘들다고 판단해서는 아예 땅을 되사버리는 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점차 반일 투쟁으로 이어지게 됐다.
해방이 됐지만 아직도 땅은
1945년 해방이 되면서 하의도 주민들은 하의도 땅이 자신들의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적산(패망한 일제의 재산)이라고 해서 신한공사에 넘어갔다. 그리고 소작료를 걷어가려고 하자 하의도 주민들은 소작료를 낼 수 없다고 저항을 했다.
이에 미군정은 ‘폭동’으로 규정하면서 체포를 했고 하의도 주민들 중 일부는 징역형을 선고 받아야 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 수립되면서 하의도는 무상환원을 위해 정부와 국회에 탄원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국회의원과 농림부에서 하의도로 현지 조사를 했다. 그리고 1950년 2월 하의도 농지에 대한 소유권 무상환원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이에 개인별 농지 조사에 착수하려고 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중단됐다. 6.25 전쟁이 끝난 직후 하의도 주민들은 다시 국회에 탄원을 했지만 1956년 6월 하의 3도 1,500정보의 농경지를 무상환원이 아닌 평당 200원의 가격으로 적산을 불하받는 형식을 취해 농민들에게 유상환원했다.
다만 아직도 많은 토지가 국가 이름으로 남아있다. 하의도 농지탈환 운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