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05년 5월 27일은 러일전쟁의 최대 변곡점인 쓰시마 해전이 발발했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이 벌인 해전이다.
쓰시마 해전은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해전이었고, 이 해전으로 인해 러시아 제국은 한반도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고, 국제사회가 일본 제국의 한반도 지배를 사실상 인정하게 됐다.
러시아 제국은 이날 해전으로 인해 해군을 완전히 상실하게 됐고,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까지 영향을 미쳤다. 반면 일본은 사할린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한반도, 만주, 사할린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영향은 막강해졌다. 다만 이날 해전 승리의 기억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해전에서 패배하게 만든 요인이 됐다.
발트함대 출격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러시아의 주요 군항 뤼순을 기습했다. 이로 인해 러시아 태평양 함대가 큰 타격을 받았고, 항구는 봉쇄된 상태이다.
러시아로서는 태평양 함대 봉쇄를 풀고 제해권을 장악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 결국 러시아는 발트함대를 출격시켜야 하는 상황이 됐다.
발트함대는 표트르 1세에 의해 창설됐으며 러시아의 가장 막강한 해상전력이었고, 러시아의 자존심이었다.
당연히 발트해에 있었기 때문에 머나먼 극동으로 발트함대를 보내야 했다. 기본적인 전략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보낸 후 잔존한 태평양 함대와 합세해서 압도적인 해상전력을 바탕으로 일본군 함대를 격파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유럽을 돌아 아프리카로, 그리고 필리핀을 거쳐 청나라 그리고 대한제국에 이르는 엄청난 대장정을 해야 했다.
1904년 10월 14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 리바우 항에서 출발한 발트함대는 일본으로 향했다. 총 전력은 전함 7척, 순양함 7척, 보조순양함 5척, 구축함 9척 등 총 38척의 전투함과 26척의 수송함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도중 연료 부족 문제, 풍토병 문제 등등 온갖 고난을 다 겪어야 했다.
일본으로서의 최선 전략은 발트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무사히 도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태평양 함대와 합류를 하게 된다면 일본이 패배할 것이 불 보듯 분명했다.
일본은 발트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들어가기 전에 격파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문제는 어디서 발트함대를 막을 것이냐이었다.
발트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대한해협, 혼슈와 훗카이도 사이의 쓰가루 해협, 훗카이도와 사할린 사이에 있는 소야 해협 중 하나를 선택해서 통과해야 한다.
일본으로서는 3군데를 모두 봉쇄하기에는 전력이 부족했다. 일본으로서는 천운에 맡기는 것 이외에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본은 결국 발트함대가 가장 거리가 짧은 대한해협(쓰시마해협)을 통과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발트함대 역시 대한해협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날 결국 전투가 벌어졌고, 다음날 추격전까지 합쳐서 이틀간 전투를 치렀다. 이 과정에서 발트함대는 총 37척 중 전함 6척, 순양함 3척 등 19척이 격침됐고, 주력 전함 2척을 포함한 7척이 나포됐다. 사실상 발트함대가 궤멸된 것이다. 반면 일본은 어뢰정 3척만 잃어버렸다.
대한제국 사실상 일본으로
이날 패전은 러일전쟁 종식을 의미한다. 당시 니콜라이 2세는 사할린이 점령 당하기 직전 종전 조약을 맺으라고 각료들에게 재촉을 했다.
일본 역시 신흥국으로 러시아와 계속 전쟁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중재를 요청했고 포츠머스 조약이 타결됐다.
만주는 사실상 일본의 소유권으로 넘어갔다. 1895년 청일전쟁 패배로 인해 만주가 일본 손으로 넘어갔지만 러시아가 버티면서 만주에 일본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러일전쟁을 계기로 만주의 소유권이 일본으로 완전히 넘어간 것이다. 또한 남사할린도 할당해줬다.
이날 러시아의 패전은 제정 러시아에게는 큰 타격이 됐다. 더 이상 황제를 러시아 국민들이 신뢰를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게 됐고, 그해 결국 황제는 헌법제정과 의회의 창설을 약속했고, 정부가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군대의 통제권을 다시 장악해 혁명이 막을 내렸다.
또한 1917년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소련이 탄생하게 됐는데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주요 원인 중 하나이다.
아울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하고의 전투에서 육군은 그런대로 버틸 수 있었지만 소련의 해군은 독일군에게 압도 당하는데 그 원인도 발트함대가 격파됐기 때문이다.
일본으로서는 대한제국의 식민지배를 사실상 국제사회에서 용인하게 된 계기가 됐다. 막강한 러시아 군대를 격파했다는 것은 국제사회로 하여금 일본의 힘을 느끼게 만들었고, 그것은 대한제국을 일본이 지배해도 좋다는 인식을 심어주게 만들었다.
다만 일본 해군에게는 악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함대의 단기 결전'에 집중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도고 헤이하치로가 기함인 미카사에 탑승해 직접 선두에서 진두지휘를 해서 승리를 했기 때문에 이때부터 일본 해군은 최고사령관이 직접 기함에 탑승해 일선 지휘를 하는 것이 관례가 됐다.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는 최고사령관이 직접 기함에 탑승해 일선 지휘를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레이더 등이 발명되고, 무선 통신 기술이 점차 발전하면서 최고사령관이 굳이 기함에 탑승하기 보다는 오히려 지상에서 명령을 내리는 것이 더 합리적인 상황이 됐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 당시 미군은 하와이의 태평양함대 본부에서 총지휘를 했지만 일본은 기함에서 일선 지휘를 했다. 그러다보니 미군은 상황 파악을 빠르게 할 수 있었고, 그에 따른 대처를 할 수 있었지만 일본은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그에 따라 대처가 늦어졌고, 그러면서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