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53년 6월 2일 영국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이 거행됐다.
영국은 입헌군주제이기 때문에 여왕의 등극이 영국 정치에 큰 변화를 예고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영국 상황은 그야말로 풍전등화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위상이 크게 변화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여왕의 등극은 새로운 영국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2차 대전 승리국이었지만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승리국이다. 하지만 허울 좋은 승리국이다. 독일의 폭격으로 인해 런던의 건물들이 크게 무너졌고, 영국의 경제가 상당히 침체된 시기였다.
전후 영국을 발전시켜야 할 숙제를 안고 있었던 상황에서 여왕의 등극이기 때문에 영국 국민들로서는 여왕이 앞으로 어떤 식의 행보를 보일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컸다.
물론 앞서 언급한대로 입헌군주제이기 때문에 여왕의 역할은 다소 없고, 총리가 권한을 행사한다고 하지만 ‘여왕’이 주는 존재감은 영국 국민에게는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 인도 등 식민지의 독립은 영국 국민들에게는 충격이나 마찬가지였다. 2차 대전 직후 인도가 독립했고, 실론, 버마, 말라야, 이집트, 로디지아 등의 독립이 이뤄졌다. 이들 식민지였던 나라의 국민들은 독립을 했다는 점에서 환호를 지르겠지만 영국 국민 입장에서는 식민지였던 나라들이 독립했다는 것은 영국이 그만큼 위축됐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상실감은 대단했다.
여왕은 상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여왕의 등극은 이런 영국 국민들의 상실감을 어떤 식으로 해소시켜줘야 할 것이냐는 숙제를 안은 것이었다.
더 크고 화려하게
조지 6세가 1952년 2월 6일 암으로 서거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는 엘리자베스 2세는 케냐에 있었다. 조지 6세의 서거는 자동으로 맏딸인 엘리자베스 2세에게 왕위가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1952년 2월 6일 캐나다 추밀원은 엘리자베스 2세를 캐나다 여왕으로 선포했다. 그리고 다음날 영국 여왕으로서 선포가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이뤄졌다.
그리고 1953년 6월 2일 대관식이 열렸다.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화려하게”를 외쳤다. 또한 처음으로 TV생중계를 실시했다. 이로 인해 2천500만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웅장하게 대관식이 거행됐다.
이처럼 화려하면서도 TV 생중계를 한 이유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대외적으로 영국 위상이 위축되고, 폐허가 된 영국을 되살려서 대외적 위상 회복과 국내 자긍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만큼 당시 영국 상황은 대내외적으로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여왕의 등극은 영국 국민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등극하자마자
여왕으로 등극하자마자 엘리자베스 2세는 1953년 11월부터 영국 연방을 순회했다. 오스트레일리아(호주)와 뉴질랜드 순방은 영국 군주로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영국 군주로 50년만에 인도를 방문했고, 남아프리카와 페르시아만 연안 국가들을 꾸준하게 순방했다.
이같은 순방은 1977년 여왕 즉위 25주년에 영국 연방 35개국 지도자들이 축하 연회에 참석하는 것으로 결실을 맺었다. 급속히 추락하던 영국의 위상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이에 엘리자베스 2세는 비단 영국의 상징으로 전세계에 인식됐다. 전세계에서 생존한 군주 및 국가원수들 중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군주이면서 가장 나이가 많은 여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