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증권파동
[역사속 경제리뷰] 증권파동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6.13 1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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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은 미리 사둔 특정 종목의 주식을 방송에 나와 추천한 후 가격이 오르면 팔아치운 증권전문가를 처벌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43)의 재항고심에서 무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최근 다시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무죄라는 원심판단을 대법원이 2번이나 연속으로 깬 것이다.

2009년부터 모 증권방송에서 증권전문가로 활동한 A씨는 2011년 10월~2012년 1월 안랩(안철수연구소), 서한, 바이오스페이스, 바른손 등 주식을 미리 저가에 사들인 뒤 방송과 자신의 인터넷카페 유료 회원에게 보내는 문자 메시지 등을 통해 추천했다.

이후 해당 정보를 접한 일반 투자자들의 주식 매수로 주가가 오르면 곧바로 되파는 방식으로 37억원의 수익을 거뒀다.

이에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로 2013년 재판에 넘겨졌는데 특정 종목을 추천하기 직전 매수하고 주가가 오르면 팔아 차익을 남기는 이 수법은 ‘스캘핑(가죽 벗기기)’ 범죄가 최초로 적발된 사례이다.

그러나 1심은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2심도 무죄로 판단했다. 대법원에서는 스캘핑 행위가 자본시장법이 금지하는 ‘부정수단·계획·기교를 사용해 주식 매수를 추천한 행위’라고 판단했고, 무죄 판결을 파기하고 서울 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파기환송심에서도 대법원의 주문과 달리 무죄가 선고 됐고, 대법원은 A씨에 대해 유죄가 인정된다면서 두 번째로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증권 매수 추천 행위는 투자자에게 특정 증권이 사기 적합하다는 사실을 소개해서 그 증권에 대한 매수 의사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자본시장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사진=한국거래소
사진=한국거래소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최악의 증권 파동

대한민국 사상 최악의 증권 파동은 1961년 발생했다.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군부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통해 행정부와 입법부 등을 사실상 장악했지만 민정 이양을 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

민정 이양을 하기 위해서는 결국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군복을 벗고 대통령 선거에 나서야 했다. 그러자면 돈이 필요했다.

이에 1961년 11월 중앙정보부는 당시 증권가에서 이름난 윤응상이라는 사람을 만난다.

윤응상은 그해 11월 말에서 12월 초 공공사업인 한국전력 주식을 사들여 한전 주가를 올렸다. 그 이전에 중앙정보부는 한전의 대주주로 있던 농협에게 압력을 가해서 한전 주식을 시가보다 싸게 매각하라고 협박을 했다.

이에 농협은 한전 주가를 시가보다 8백환 싼 주당 1만 5천환의 가격에 12만 8천주를 헐값으로 불하하기로 했고, 윤응상은 5만 주를 사들여 약 8억 6천환의 폭리를 취했다.

이를 바탕으로 윤응상에게 ‘통일증권’ ‘일흥증권’ ‘동명증권’ 세 증권 회사를 설립하게 했다. 윤응상의 대증주(대한증권거래소주식) 70% 매입과 더불어 5개년 경제개발계획에 필요한 자금조달을 위해 증권시장을 적극 육성하겠다는 박정희 정부의 발표가 뒤따르자 주당 5전에 거래되던 대증주는 1962년 4월 18일에는 21환 10전까지 폭등하게 된다.

1962년 4월 말 윤응상은 40억환 증자를 추진하게 되고, 액면가 50전인 대증주를 29배인 14환 50전으로 뻥튀기 해 투자자들로부터 청약을 받는데 이때 수탈한 금액은 무려 136억환에 달한다.

그러나 엄청난 주가 폭등을 의심한 투자자들의 청약률이 67%에 그쳐 부진을 보였고, 투자자들이 본격적인 주식 매도를 시작했다.

매도 물량이 많아지면서 주가는 급락하기 시작했고, 윤응상은 주가 유지를 위해 매수를 거듭했지만 매도 물량이 많기 때문에 급락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자금부족으로 투자자들에게 주식을 현금으로 바꾸어 줄 수 없는 ‘수도결제 불능 사태’에 직면하게 됐고, 중앙정보부가 ‘한일은행’을 통해 50억환을 융자하게 했으나 여전히 수도 자금 부족 현상은 이어졌다.

결국 5천340명의 피해자가 발생했고, 연일 자살 소동이 발생했다. 피해 금액은 무려 138억 6천만환인데 현재 가치로는 대략 60조원 정도이다.

증권파동 당시 재판 받고 있는 유응상 일당들. 전원 무죄 선고 받았다./사진=금융투자협회
증권파동 당시 재판 받고 있는 윤응상 일당들. 전원 무죄 선고 받았다./사진=금융투자협회

증권 파동 이후

사회적 여론이 악화되자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특별감사단을 꾸렸고, 진상조사에 나섰다. 결국 윤응상 일당이 구속되고, 검찰과 군법회의에서 징역 7년 등 전원 유죄 구형을 받았지만 그 이후 군법회의에서 의혹의 원인이 없다면서 전원 무죄 선고를 받았다.

대략 증권파동을 통해 중정이 20억환을 벌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훗날 김형욱은 “박정희에게 일부 상납되고 민주공화당 창당자금, 야당 교란 등의 공작자금으로 쓰였다”고 폭로했다.

증권파동이 만든 여파는 상당히 컸다. 그때까지 기업들의 자금조달에 있어 주식시장이 커다란 축을 담당하는 듯 했지만 증권파동으로 인해 주식시장이 불안하다는 것을 깨달은 기업들이 은행대출, 사채에 의존하게 됐고, 어음 거래 등으로 이어지게 됐다.

그러다보니 사채나 은행대출 등으로 자금 조달을 했던 기업들이 부실기업이 되면서 1997년 줄도산하게 이르렀고, IMF 사태를 맞이했다.

이때 만약 주식시장이 건전하게 돌아갔다면 기업들도 자금 조달을 주식을 통해 하게 되면서 건전한 경영 활동을 하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건전한 기업들이 성장하면서 IMF 사태와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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