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50년 6월 28일은 6.25 전쟁 중 국군이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한 날이다.
당시 육군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북한군 전차가 시내로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 폭파를 명령한 후 시흥으로 향했다.
한강 인도교 폭파는 이승만 대통령이 수도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향한 후 발생한 사건이다. 서울 시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아서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한나라의 국가 원수가 전쟁 중 수도를 버리고 후퇴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것도 침략군을 격퇴하고 있다는 방송을 하면서 후퇴를 했기 때문에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비판을 받은 사건이기도 하다.
이승만, 수도 서울 버리고 피난길에
6월 25일 새벽 전쟁이 발발했고,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이 점령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야말로 긴박한 상황이 전개되면서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수도 서울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27일 피난길에 올랐고, 그날 저녁 10시 대전 충남도지사 관저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육성으로 녹음했고, 해당 녹음 방송은 KBS 제1라디오를 통해 전파를 탔다.
이승만 대통령의 방송 내용은 “적이 서울에 다가오고 있으나 우리는 싸울 것이 전무하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과 미군이 참전하기로 했고 빠른 시일내에 도착할 것이며 이 좋은 소식을 국민들에게 전한다”라는 것이다.
당시 서울 시미들은 국방부에서는 계속해서 괴뢰군을 물리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기에 이승만 대통령의 방송과 합쳐져서 국군이 괴뢰군을 무찌르고 있다고 착각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 인도교, 한강철교, 경인철교는 폭파됐다. 그러면서 서울은 사실상 고립됐다. 당시 서울에서 유일한 다리가 끊겨졌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시민들은 피난을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은 9.27 서울 수복 이후 북한군 노역에 동원된 서울시민들을 ‘부역자’ 협의로 처벌했다. 국방부의 허위 방송을 믿고 성루에 남아 있다가 한강대교의 폭파로 도망가지 못하고 서울에 고립됐었고, 피난간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부역자 혐의로 처벌을 받았다.
제1한강교의 전략적 요충
사실 제1한강교라고 불리는 한강인도교와 한강철교는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지금의 한강대교 위치는 강의 유속이 느리고 강폭이 좁아 포구가 형성되기 좋았다. 한강을 타고 강화를 통해 서해바다를 나가면 북으로 남으로 서로 해서 사통팔달의 교통 요충지였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도 이 지역은 상당히 중요한 지역이기도 했다.
이는 구한말 인천항이 개항하면서 더욱 중요해졌다.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한강철교가 가설됐고, 열차가 오가기 시작했다.
이후 한강인도교가 새설되면서 영등포와 노량진 일대가 급격히 도시화가 됐다. 그러다가 해방이 된 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한강인도교와 한강철교가 폭파된 것이다.
6.25 전쟁 이후 부교와 가교 형태로 복구됐으며 1958년 5월 15일 다시 세워졌다. 그러다가 양화대교가 건설되면서 제1한강교로 이름이 붙여졌고, 현재는 한강대교라고 부르고 있다.
이 한강 인도교라는 별칭이 있었던 이유는 한강홍수통제소의 수위 관측지점 명칭이어서이다. 여름철 홍수 때마다 잠수교와 함께 거론되는 다리이다.
겨울이면 한강이 얼어붙었다는 기준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결빙 여부를 한강대교에서 판단한다.
2000년대까지 한강대교는 자살 대교로 악명을 떨쳤다. 이런 이유로 미끄럼 장치를 설치하거나 윤활유를 바르기도 했다. 하지만 자발방지 캠페인 등으로 인해 그 숫자가 많이 감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