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대통령기록물 그리고 조선의 기록문화
[오늘 통한 과거리뷰] 대통령기록물 그리고 조선의 기록문화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6.29 1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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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서해 피격 공무원 사건을 해경이 2년여만에 월북 결론을 뒤집으면서 정치권은 큰 파장이 일어나고 있다. 또한 유가족이 전임 정부를 향한 고발전에 뛰어들면서 법적 논쟁까지 벌어지고 있다.

유족 측은 서훈 전 국가안보실장과 청와대 민정수석실 관계자를 고발한 데 이어, 수사를 관할한 해경과 청와대 관계자를 28일 추가 고발했다.

이와 더불어 유족 측은 문재인 전 대통령의 고발 가능성도 열어뒀다. 야당이 의석수 절반 이상을 차지한 국회가 사건 당시 정부의 대응 정황이 담긴 대통령지정기록물 공개에 동의하지 않으면 문 전 대통령을 고발하겠다는 것이다.

대통령지정기록물이란

대통령지정기록물이란 대통령의 보좌기관·자문기관 및 경호업무를 수행하는 기관에서 생산하는 기록물과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생산하는 기록물을 말한다.

그것은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제3조 제2호에 따른 기록물과 국가적 보존가치가 있는 대통령상징물(대통령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진 물품 및 행정박물 등을 말한다)과 대통령선물(공직자윤리법 제15조에 따른 선물을 말한다) 등을 말한다.

대통령기록관은 유족들에게 대통령지정기록물을 공개하지 못한 것은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조선시대 기록문화

대통령지정기록물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면서 조선시대 기록문화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조선시대 공식 기록문화는 크게 사초,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으로 나뉜다. 물론 개인이 자서전 등을 통해 기록을 남긴 경우도 있다.

사초는 사관이 공식적인 역사 편찬 즉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만든 역사적 자료이다. 사관이 왕을 일일이 따라다니면서 기록한 자료이다. 이는 임금이라도 사초를 볼 수 없게 규정돼 있다.

매우 방대한 분량이었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이 편찬되면 사초를 세초해서 종이로 재활용했다. 따라서 사초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 사초로 현재까지 남은 기록물은 이담명 승정원사초, 마애사초, 기사찬초, 당후일기 등 사관 개인이 소장해서 현재까지 이어져 올 뿐이었다.

하지만 사관 개인이 소장해서 현재까지 내려온 사초라고 해도 분량이 방대해서 번역조차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극소수 일부 사초가 현재까지 남아있다고 해도 그 분량이 방대하기 때문에 만약 500년 역사의 사초가 모두 남아있다고 한다면 한반도 전역을 사초로 덮고도 남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중종대왕실록./사진=연합뉴스
중종대왕실록./사진=연합뉴스

방대한 분량의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할 때 참고 자료가 사관의 사초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바로 승정원일기이다.

조선시대는 승정원이라는 현재 대통령비서실과 같은 왕의 비서실 역할을 하는 부서가 있었다. 그 곳 주서 2명이 작성한 일지가 바로 승정원일기이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가 시작된 시점부터 조선왕조가 멸망한 시점까지 하루도 쉬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임진왜란 직전까지의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화재로 불탔다. 또한 이괄의 난에 불탔고, 영조 시대 때 소실됐고, 세손인 정조의 요청으로 사도세자 사건 등이 파기됐다. 따라서 현재 남은 기록은 인조 1년부터 시작해서 경술국치로 멸망한 순종 4년까지 287년 분량이다.

그럼에도 그 분량이 방대하다. 조선왕조실록의 글자 수가 4천964만 6천667자라면 현재 남아 있는 승정원일기는 대략 2억 4천250만자이다.

일기이기 때문에 ‘날짜’가 들어간다. 또한 측우기를 통해 강수량 정도를 기록하는 등 그날 일기(日氣)가 들어갔다. 예컨대 해무리가 끼었다거나 안개가 가시거리가 어느 정도 끼었다거나 구름이 몇시께 사라졌다는 등 자세하게 기록했다.

그 다음에 임금의 경연을 기록했는데 임금이 언제 어디서 어떤 신하와 경연을 했고, 읽다만 책의 구절과 임금과 신하의 대화 내용 등을 기록했다. 해당 부분은 마치 동영상을 틀어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의원이 임금의 건강을 살폈다는 기록도 있는데 전날 왕의 건강상태 그리고 그날 임금의 맥박이 어떠했다는 식의 기록이 있다.

그 다음으로 주요 왕족인 왕비, 대비, 세자 등의 안부가 나온다. 이것이 서두부분이고 본론으로 들어가면

각 관서에서 국왕에게 올린 문서와 거기에 대한 국왕의 결재여부와 후속처치, 의정부의 인사행정, 여러 상소와 장계, 당일에 근무하는 승정원 소속 관리 명단, 당일 국왕의 행적, 국왕과 신하 간 모든 토론 대화내용, 그 날 임금의 진료여부와 처방받은 약의 약방문 등이다.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의 기록을 역사서로 편찬한 기록물을 말하고 국보 제151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정족산사고본, 태백산사고본, 오대산사고본과 함께 국보명으론 기타산엽본이 유네스코 측에는 상편 21책으로 되었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이 편찬됐었지만 이미 일제강점기 때였기 때문에 왜곡된 부분이 있어 문화재청에서는 별도로 취급하지 않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사초와 실록을 열람할 수 없게 금기돼왔다. 만약 열람을 시도하려고 했다가는 신하들의 반발이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사관이 자신을 어떤 식으로 기록했는지 보고 싶다고 했다가 신하들의 반발로 이뤄지지 못했다.

세종대왕은 아버지 태종실록 편찬이 끝난 후 실록을 보려고 했지만 신하들이 반대해 뜻을 접었다.

태종실록에는 왕 즉 태종 이방원이 사냥 도중 말에서 떨어지자 임금인 이방원이 사관에게 말에서 떨어진 것은 기록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것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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