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조선은 왜 상업을 천시했나
[역사속 경제리뷰] 조선은 왜 상업을 천시했나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6.29 13: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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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드라마 장사의 신 - 객주 2015 한 장면
KBS 드라마 장사의 신 - 객주 2015 한 장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조선은 상업을 천시한 나라로 인식돼 있다. 물론 조선후기 들어서 상업이 다소 발달했지만 조선전기는 아예 상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현상이 발생한 것을 ‘성리학’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동아시아의 상황 때문이기도 하다. 태종 때나 세종 때 화폐를 발행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은 조선 정부가 상업을 발달시키기 위해 노력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의 어려움 때문에 결국 공무역을 제외한 사무역을 아예 금지하게 됐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원-명 교체기로 무역 네트워크가 무너져

조선시대 이전에도 농촌을 중심으로 하는 자급자족 경제였지만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도 무역은 활발했다.

하지만 조선시대 들어오면서 무역이 급격히 쇠퇴했다. 그 원인 중 하나가 원-명 교체기로 접어들면서 무역 네트워크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고려시대는 원과 왜의 중간에서 중간무역으로 큰 이득을 얻은 나라였다.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은 은 1냥을 교초 10관으로 정해놓고 교초라는 화폐를 유통 시켰다.

그리고 고려는 무역을 통해 많은 교초가 한반도에 유입됐다. 문제는 전세계 흑사병 대유행이 원나라에서도 발생했다.

흑사병이 발생하면서 원나라 경제 시스템이 완전히 무너지게 됐다. 그러면서 ‘교초’는 휴지조각이 됐다. 당연히 고려땅에 있었던 교초 역시 휴지조각이 된 것이다. 수많은 상인들이 하루아침에 파산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고려말기에 상업을 기반으로 한 귀족이 출현하지 못하면서 사대부는 ‘땅’ 즉 경작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여기에 명나라는 국제무역을 최대한 억제를 했다. 그것은 왜군의 침략 때문이다. 당시 왜군이 한반도는 물론 중국땅도 침략을 하면서 명나라는 아예 무역을 닫아버렸다. 그것은 자급자족 경제 체제로 전환을 해도 명나라는 먹고 사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비슷했다. 농사로도 충분히 자급자족할 수 있는 경제 시스템이 있다는 것 자체가 굳이 상업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됐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은본위 체제의 문제점

명나라가 해외무역을 아예 금지해버리면서 조선도 무역을 금하게 되는 상황이 됐다. 그렇다면 국내에서의 상업은 발달했을 수도 있지 않겠냐는 추론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는 치명적인 함정이 있다. 바로 화폐를 주조해야 하는데 그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것이다.

서양은 금본위 체제였지만 동양은 은본위 체제이다. 은화를 유통하기 위해서는 은광을 발견하고 은광을 통해 은을 추출하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조선땅은 은이 산출되는 지역이 아니었다. 은화를 유통시키고 싶어도 시킬 수 없는 그런 상황이다.

이런 이유로 쌀이나 삼베 등 현물거래만 있었을 뿐 화폐경제가 발달할 수 없었던 구조였다. 물론 조선후기 들어오면서 점차 화폐 경제가 발달하게 됐다. 그것은 명나라와 달리 청나라는 무역에 점차 문호를 개방하면서 조선도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앙법(모내기) 도입으로 인해 쌀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그에 따라 화폐경제도 점차 발달하게 됐다.

인플레이션 문제도

조선전기 상업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인플레이션 문제도 있었다. 조선 전기는 농촌을 기반으로 한 자급자족 경제였다.

만약 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된다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즉, 시중에 화폐가 많이 풀리면 풀릴수록 물가는 상승하게 된다. 즉, 쌀값이 폭등할 수 있다.

쌀값이 폭등한다는 것은 농민의 경제기반이 무너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에 아무리 사대부가 의도적으로 상업을 발달하려고 했다고 치더라도 농업 경제가 무너지게 되면 조선이라는 나라가 무너지게 되기 때문에 상업을 규제함으로써 농업을 살리려고 했던 의도도 깔려있다.

앞서 언급한대로 조선후기 들어와서 이앙법 보급으로 인해 농촌의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민간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상인 조합도 생겨나고, 어음, 계 등의 금융거래도 이뤄졌다.

또한 정조 때는 금난전권을 폐하고 사상(私商)에게 상업 활동을 허용했던 것이나 대동법 실시 등을 살펴보면 조선 정부가 아예 상업활동을 천시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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