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 되자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산 화학조미료 ‘아지노모도’가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일본으로 철수를 했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화학조미료 수요가 엄청났지만 아지노모도의 공급은 그것을 뒷받침해주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밀수입되거나 위조가 되기도 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1956년 동아화성공겁이 최초의 한국산 화학조미료 미원을 출시했다. 아지노모도가 우리나라 말로 ‘미원’인 것이다. 미원이 발매되면서 우리나라 화학조미료 시장을 석권했고, 결국 1962년 동아화성공업이 미원(주)로 바뀌었다.(훗날 대상으로 사명을 변경함) 그만큼 미원이 우리나라 화학조미료 시장 점유율 50%를 넘어서면서 국민 조미료가 됐다. 당대 최고 여배우로 등극하기 위해서는 미원 광고 모델을 거쳐야 할 정도로 미원의 인기는 대단했다. 실제로 배우 김지미, 배우 황정순 등이 미원 광고 모델을 하면서 그 인기가 절정에 달했다. 그러면서 1960~70년대는 미원을 포장해서 선물하는 것이 가장 최고의 선물이었다.3천원 스웨터 vs 3kg 금반지
이같이 미원이 인기를 얻자 삼성 계열사였던 제일제당이 1963년 미풍을 생산하던 ‘원형산업’을 인수해서 미풍을 내놓았다. 그리고 대대적인 마케팅을 했다. 그러면서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초까지 조미료 전쟁이 시작됐다. 이들은 대대적인 마케팅을 한 것은 물론 파격적인 경품 광고 전쟁까지 벌어졌다. 1970년 1월 31일 미풍의 지면 광고를 보면 미풍 빈 봉지 다섯장을 보내는 1만명에게 선착순으로 3천원짜리 여성용 스웨터를 경품으로 내걸었다. 3천원은 근로자 월급의 1/10 정도 되는 돈이었다. 이에 미원은 ‘새 포장 발매기념 사상 최대의 호화판 사은 대잔치’라는 제목으로 15만명에게 선착순으로 3kg 순금반지를 내걸었다. 당시 미원 사원들은 광고 이후 밀려드는 미원 봉지를 정리하느라 진땀을 뺐다는 후문도 있다. 이같은 판촉 전쟁은 상공부와 치안국이 개입을 해야 할 정도였다. 결국 양사는 ‘사은잔치 중지’ 성명서를 내면서 일단락됐다. 1969년 4월 3일에는 미풍 측이 일본 이노신산소다를 수입하겠다고 발표하고 광고 싸움을 하다가 결국 법정 분쟁으로 번졌다. 미원이 새 조미료의 원료를 수입하는 것은 외화를 낭비하고 한국 기술의 개발을 해친다고 하여 성명서와 신문광고를 내며 맞선 것이다.2차 조미료 전쟁 발발
이처럼 1차 조미료 전쟁이 있은 후 제일제당은 1975년 11월 20일 천연조미료라면서 ‘쇠고기 다시다’를 출시했다. 여전히 미원에게 밀렸던 제일제당은 1980년대 초반 화학조미료 MSG 유해론이 일어나면서 천연조미료 다시다의 판매가 늘어났다. 점차 미원의 아성이 무너지는 것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 미원(주)는 ‘맛나’를 내놓으면서 다시다와 경쟁을 했다. 이때 다시다는 전원일기의 인기를 얻었던 김혜자를 내세웠고, 맛나는 며느리역을 맡은 고두심을 내세우면서 서로 경쟁이 치열했다. 쇠고기 다시다와 쇠고기 맛나의 싸움은 비단 마케팅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영업사원들 간의 패싸움으로 이어졌다. 경찰서에 쇠고기 다시다와 쇠고기 맛나의 영업사원들이 함께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다.이재용-임세령 결혼했지만
이런 조미료 전쟁은 1998년 대상 창업주 임대홍 회장의 손녀 임세령씨가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손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결혼하면서 막을 내리는 듯 했다. 하지만 2009년 이들이 이혼을 하면서 조미료 전쟁이 다시 발발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이병철 회장은 ‘호암자전’이라는 자서전에서 “세상에 내 마음대로 안되는게 골프, 자식, 그리고 미원”이라고 했다. 그 정도로 조미료 전쟁은 치열했다. 이런 조미료 전쟁은 영화로도 제작됐는데 1988년작 장선우 감독의 성공시대이다. 야심가 김판촉 역에 안성기 배우가, 성소비 역에 이해영 배우가 출연했고, 대기업 간에 벌어진 조미료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서 김판촉의 흥망성쇠를 그린 영화로 블랙 코미디 영화이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