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 투하
[역사속 오늘리뷰]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 투하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8.09 09: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는 모습.
일본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는 모습.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45년 8월 9일은 나가사키 도시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날이다. 이는 태평양 전쟁 당시 승기를 잡은 미국이 일본 제국의 항복을 이끌어 내기 위해 원폭을 투하한 사건으로 현재까지 히로시마와 더불어 원폭을 실제로 투하한 유일한 사건이다.

만약 원폭을 투하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일본인들은 지구 상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유는 일본이 끝까지 항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미국의 손실도 상당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폭이 투하되면서 일본은 자신은 피해자라는 인식을 갖게 됐고, 미국은 가해자라는 인식을 오늘날 일본인들이 갖고 있다.

원폭 투하 이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장면을 보고 “내가 만약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일을 예견했었다면, 1905년에 쓴 공식을 찢어버렸을 것이다”고 말했을 정도로 끔찍한 사건이었다.

원폭 투하를 맨해튼 계획이었는데 이는 나치 독일이 핵개발을 우려해서 미리 선점하고자 미국과 영국이 공동 계획으로 추진했다. 하지만 실제 핵공격을 수행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패색이 짙어진 일본 제국은 소련을 중재자로 내세웠지만 소련은 중재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런 가운데 일본 군부에서 강경파가 득세를 하면서 일본 제국에서도 ‘항복은 없다’는 인식이 강하게 깔렸다.

1945년 7월 26일 포츠담 선언이 발표했지만 일본 제국은 무조건 항복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미국은 일본 본토를 미군이 만약 상륙시킬 경우 그에 따른 희생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미군이 만약 일본 본토를 상륙한다면 100만명의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일본 제국은 전국민 옥쇄를 각오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일본 제국 군인들을 상대하는 것과 일본 국민 모두를 상대하는 것이 차원이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히로히토 일왕
히로히토 일왕

소련의 참전 징후

소련이 본격적으로 참전을 한 것은 8월 9일 즉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한 날이지만 그 이전부터 계속해서 소련이 참전 의지를 불태웠다. 그것은 사할린을 점령하고, 한반도를 점령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도 빨리 전쟁을 종식시키지 않으면 한반도 전체가 소련땅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런 소련의 참전 징후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이 항복하지 않는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더 이상 희생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일본 전역에 핵폭탄 투하할 계획

사실 미국은 히로시카와 나가사키 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에 핵폭탄을 투하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후보지 몇군데를 골랐고, 그 후보지에는 일본 왕의 상징인 교토도 있었고, 도쿄도 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이후 일본이 만약 항복을 하지 않았다면 3차 원폭 투하 후보지는 ‘도쿄’였다.

사실 이미 도쿄는 엄청난 공습으로 사람이나 건물이나 남아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왕이 살고 있는 도시라는 상징성 때문에 3차 원폭 투하 후보지로 선정했다.

일본 군부의 혼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면서 일본 군부는 혼란에 빠졌다. 당장 항복하자는 항복파와 옥쇄파로 나뉘게 됐고, 그야말로 쿠데타에 쿠데타가 일어났다.

만약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도쿄에 원폭이 투하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일본 군부에서 항복파가 득세를 하게 되면서 히로히토 일왕은 8월 15일 무조건 항복 선언을 했다.

하지만 옥쇄파는 항복하는 그날에도 일왕의 목소리가 담긴 녹음테이프를 훔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히로히토 일왕은 그날 12시 무조건 항복 선언을 한다.

진주만 공습.
진주만 공습.

피해자 코스프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면서 일본은 그 이후 자신들은 피해자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원폭이 주는 효과는 대단했기 때문에 전세계인들에게 각인이 됐다. 그로 인해 일본인들은 자신은 ‘피해자’라는 주장이 어느 정도 먹혀들어가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는 피해자는 아니다. 왜냐하면 진주만 공습 등으로 인해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고, 끝까지 항복을 하지 않고 옥쇄를 하겠다고 버텼으니 피해자라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또 다른 이유는 6.25 전쟁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공산주의가 한반도를 점령하고 일본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서방세계를 강타하면서 일본의 피해자 코스프레에 대해 동조를 하게 됐다.

미국 역시 일본이 가해자라는 것을 알았지만 일본을 통해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긴밀한 관계가 된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일본 내 역사 왜곡으로 이어졌다.

사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한 후 미국은 일본을 낙농국가로 만들려고 했다. 그래야만 자신들에게 공격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을 낙농국가로 만들겠다는 미국의 구상은 포기하게 됐고, 빠른 산업화로 인해 성장을 하게 됐고, 결국 1964년 도쿄 올림픽을 통해 일본이 부활했다고 선언하게 된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