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우장춘 박사는 우리나라 농업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애국자로 추앙되는 인물이다. 을미사변의 주역 매국노 아버지 밑에서 애국자가 나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우장춘 박사는 ‘씨 없는 수박’을 발명하지 않았다. 다만 씨 없는 수박을 우리나라에 소개했을 뿐이다.
만약 우리나라에 우장춘 박사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농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우장춘 박사가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을 상당했다.
친일파의 아들로
우 박사는 친일파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우범선은 훈련대 제2대대장이었다. 일본이 명성왕후를 시해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궁을 침범했을 때 우범선은 훈련대를 끌고 그 뒤를 엄호했다. 명성왕후 시해 이후 우범선은 명성왕후를 땅에 묻었다.
을미사변을 계기로 ‘국모보수’(國母報讐)를 내세워 의병 봉기가 일어났고,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면서 우범선은 결국 일본으로 달아났다.
우 박사는 일본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일본인 사카이 나카(酒井ナカ)다. 우범선은 1903년 고영근에 의해 암살되면서 가세가 기울어졌고, 결국 우 박사는 6살 때 고아원에 지내기도 했다. 가정 상황이 나아지면서 어머니를 따라 히로시마로 이사해서 구제중학교까지 마쳤고, 박영효의 주선으로 조선총독부에서 학비를 지원받아 1916년 도쿄제국대학 농과대학 실과에 진학했다.
우 박사는 어느날 조선의 도지사가 방일해서 조선계 학생들을 대상으로 친일 연설을 했다. 그런데 와세다 대학을 다니던 한국인 유학생 김철수가 단상에 뛰어올라 도지사의 멱살을 잡고 항의를 하자 우 박사는 충격을 받았고, 자신의 몸에 한국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김철수를 만나게 됐고, 김철수는 부친 우범선의 매국을 속죄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독립과 조선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면서 조선인의 성을 창씨개명해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이에 해방될 때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해방되면서 우장춘 귀국 운동 벌어져
1936년 과학계에서 호평을 받은 논문을 발표하면서 도쿄제국대학에서 조선인으로 두 번째로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하지만 조선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타키이 종묘 회사 연구원으로 입사해서 십자화과 식물에 대한 연구에 전력했고, 그렇게 해방을 맞이하게 됐다.
1947년 우리나라에서는 우 박사 귀국 운동이 벌어졌다. 그러자 일본에서는 우 박사를 보낼 수 없다고 완강히 버텼다. 이에 우 박사는 조선인 강제수용소에 자신의 발로 들어갔고, 우리 정부가 보내준 한국인 신분증을 제시했다.
일본으로서도 우 박사를 한국에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렇게 송환선을 타고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우리 정부가 우 박사를 원했던 이유는 우량 종자 개발과 보급을 통해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이에 우리 정부는 100만엔의 이적비를 우 박사에게 줬고, 우 박사는 우리나라에 뿌릴 우량 종자를 사는데 다 썼다고 한다.
이후 6.25 전쟁중엔 대한민국 해군 정훈장교로 임관해 소령으로 전역하기도 했다. 농업 발전에 상당한 역할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농림부가 돈이 없다고 난색을 표했고, 우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달려가 호소를 하자 농림부 장관을 불러 질책하기도 했다.
어머니 부고 소식이 들렸을 때는 이승만 정부가 일본으로 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만약 우 박사가 일본에 가며 돌아오지 못할 것을 우려했다는 소문이 있다. 결국 우리나라에서 상복을 입고 어머니 시신도 없이 장례식을 치렀다고 한다.
1959년, 서울 메디컬 센터에 입원하여 십이지궤양 수술 후 병세가 악화되어 8월 10일에 사망했다. 사망 몇 시간 전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받았는데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했구나! 그런데 조금만 더 일찍 주지...”라면서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알려졌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정부수립 이래 최초의 사회장이었다.
우리나라 농업 발전에 지대한 영향
우 박사는 1935년 ‘배추속(Brassica)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이라는 박사 학위 청구 논문을 통해 ‘종의 합성’ 이론을 제시했다. 이는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해야 하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에 감귤 농업을 제안했고, 일본산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해 한국 토양에 맞는 배추를 개발했다. 피폐해진 우리 국토에 원예와 농업을 발전시켰고, 그 당시 열악했던 우리 농학 분야에 선구자 역할을 했다.
가장 흔한 오류 중 하나가 씨 없는 수박을 만든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씨 없는 수박을 만든 사람은 교토대학의 명예교수 키하라 히토시(木原均) 박사이다.
우 박사는 사람들에게 육종학과 농업기술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씨 없는 수박과 종자를 우리나라에 가져와서 가르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