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75년 8월 17일 독립운동가이면서 정치인이자 언론인인 장준하 선생이 사망한 날이다.
장준하는 1918년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에서 장석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앙에 따라 목사를 위해 공부를 했으나 숭실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를 이유로 폐교가 되자 일본으로 건너가 토요대학 예과를 거쳐 장로회 계통인 일본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했다. 그리고 잠시 교사로 일한 바가 있다.
신성중학교 재학 시절 일제에 저항하라는 교장선생님이 일본 순사에게 잡혀가자 “일본어로 된 교과서로 배울 수 없다”면서 일본어 교과서를 찢기도 했다. 당시 장준하의 친구가 시인 윤동주와 문익환 목사였다.
일본군 강제징병
장준하는 교육활동을 계속 했지만 일본군에 자원입대 형식으로 강제징병됐다. 일제의 강요에 의해 억울하게 전쟁터에 끌려간 것이다.
장준하는 중국 장쑤성 쉬저우에 주둔하고 있는 츠카다 부대에 징집됐다. 1944년 김준엽, 박승헌 등 소수의 동지들과 함께 탈출해서 2500km를 걸어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그리고 1945년 2월부터 한국광복군, 미국 CIA의 전신인 OSS 활동을 하다가 귀국했다.
해방 이후 김구 비서로 활동을 했고, 한신대에 편입해서 신학공부를 하다가 제1공화국에서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백낙준의 추천으로 문교부 국민사상연구원 기획과장, 서무과장, 사무국장을 지내고 ‘사상계’를 창간했다. 제2공화국에서는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의원, 국토건설단 기획부장, 제2대 국토건설단 단장 등을 지냈다.
5.16 쿠데타 지지하기도
1961년 박정희 소장이 5.16 쿠데타를 일으키자 사상계 6월호에서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을 뿌리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면서 지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군사혁명위원회가 약속했던 조속한 민정 이양의 뜻이 없어 보이자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으로 돌아섰다.
1962년 막사이사이상 언론 부문을 수상했으며 박정희의 독재 행위를 막기 위해 윤보선을 야당 통합 후보로 만드는 활동을 벌이며 비판적인 언론 활동을 했다.
그리고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면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가하면서 박정희 정권에 눈엣가시였다.
의문사,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
그러던 중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시 약사봉 등산을 갔다가 의문사를 당했다. 아직까지 장준하 사망에 대한 의문점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박정희 정권이 죽였다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퍼졌다. 1993년 3월 결성된 민주당의 ‘장준하 선생 사인 규명 진상 조사 위원회’는 장준하의 사인에 대해 많은 의문점이 있다고 했다.
파주에 있는 그의 무덤에 가면 돌베개에서 “우리는 무기를 가졌습니다. 조국을 찾아야 한다는 목표물을 똑바로 겨냥한, 젊음이란 이름의 무기입니다”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유족들은 중앙정보부 등의 방해로 취업을 하지 못해 한동안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또한 2007년 7월 11일 고인을 암살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 전 대통령이 고인의 아내 김희숙 씨를 만나 사과했다.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진심으로 위로드린다. 장 선생이야말로 누구보다도 애국심이 뜨거우셨고 민주주의 열정을 갖고 계셨던 분이다. 저의 아버지와는 반대 입장에 계셨고 방법은 달랐지만 두 분 다 국가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셨다고 믿고 있다”고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