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해양수산부에 따르면 올해 소말리아 해역에서 해적사고가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올 1~6월 전세계 해역에서 58건의 해적사고가 신고됐는데 이는 전년동기 58건 대비 10건 줄어든 수치다.
지역별 해적사고 발생 건수는 아시아 32건, 중남미 13건, 서아프리카 12건, 기타 1건 등이었다. 우리나라 청해부대가 활동하고 있는 소말리아·아덴만 해역에서는 한 건의 해적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소말리아 해적은 왜 발생했나
소말리아 해적은 소말리아 내전에 기인한다. 소말리아 내전이 몇 십 년째 지속되면서 소말리아 국내 경제가 붕괴됐고, 농사도 제대로 지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여기에 바다의 경우 다른나라 어선들이 싹쓸이 하면서 어업도 사실상 붕괴됐다.
소말리아 해역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어지는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하는 해역이다.
그런데 해당 해역이 중국 등의 원양어선이 불법조업을 하면서 어업 활동도 힘들게 됐다. 또한 1990년대 무정부 상태에 놓이게 되면서 서구 유럽이나 아랍국가들이 산업폐기물은 물론 핵폐기물 투기가 이뤄졌다. 그러다보니 어자원의 씨가 말라간 것이다.
이에 소말리아 어부들은 군부들과 합작해서 해상 경비대를 결성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수에즈 운하를 통해 유럽으로 오가는 통로이기 때문에 컨테이너 선박 등 화물선 등이 눈에 띄게 됐다.
처음에는 앞바다 어장에서 싹쓸이 하는 타국 어선들을 나포, 피해 보상금을 받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보상금이 의외로 생각보다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았고, 군벌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해적질을 생각하게 됐다. 여기에 돈 냄새를 맡고 투자자들이 몰리게 되면서 하나의 산업으로 번창하게 됐다.
즉, 군부들은 무기를, 어부 등 국민은 해적의 구성원으로, 돈은 투자자들이 대는 방식을 사용했다.
2008년 해적에 의한 납치가 급증하면서 해적들이 납치로 벌어들인 돈이 3천만 달러(한화 300억원)이 되면서 산업화가 됐다.
거대한 산업으로
해적 산업이 크게 성장을 하면서 그에 따른 부수적인 산업도 발달하게 됐다. 해적들이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식량이 필요했고, 그 식량이나 생필품을 해적들에게 장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큰돈을 벌은 해적들은 소비를 하기 시작했다. 해적들은 언제 자신이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돈을 벌면 소비를 하는데 급급했다. 그러다보니 사치를 하게 되면서 그에 따른 사치품을 판매하는 상인들도 늘어났다. 심지어 해적들이 도시에 나타나면 매춘부들이 달라붙었다고 한다. 특히 인근 국가 여성들도 원거리 원정을 했다.
소탕작전 시작
2008년 이후 계속해서 소말리아 해적들에 의해 피해를 입자 미 해군은 2008년 8월 다국적 연합군을 구성해 아덴만 순찰에 나섰다.
유엔 안보리는 2008년 결의안을 통해 아덴만을 통행하는 국가의 국제적인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해당 요청에 따라 우리나라는 2009년 청해부대를 파병했다.
그리고 청해부대는 2011년 1월에 한국 화물선 삼호주얼리호가 해적이 피랍되자 ‘아덴만의 여명’ 작전으로 이를 구출했다.
여기에 해운사들이 납치된 사람들에 대한 몸값 지불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또한 민간군사기업들이 소말리아 해역으로 몰려갔다.
너무 많은 민간군사기업들이 몰리면서 오히려 인건비가 저렴해지기 시작했고, 민간해운회사들은 무장경비 병력을 선박에 태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소말리아 해적들도 납치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말리아 해적이었던 사람들이 더 이상 해적질을 할 수 없게 되면서 민간군사기업으로 입사를 했고, 무장경비 병력으로 선박을 보호하는데 앞장을 서기 시작했다.
무장경비 병력으로 채용된 해적들에 대해서도 민간군사기업들은 우대를 했다. 왜냐하면 본인들의 경험이 노하우가 됐기 때문이다.
점차 해적 산업이 사양화가 되면서 마찬가지로 해적 산업의 부대 산업들 예컨대 유흥업 등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또한 소말리아에서도 정식 정부가 세워지면서 점차 치안이 안정되면서 해적 산업 역시 사양산업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