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경신대기근은 경술년과 신해년에 닥친 대기근을 말한다. 조선 현종 11년(1670)과 12년(1671)에 걸쳐 발생한 대기근이다.
갑작스런 흉작과 병충해로 곡물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하고, 태풍, 전염병 유행 등으로 인해 전국토에 아사자가 발생하면서 행정이 마비될 정도였다.
5천년 역사에서 기근은 빈번하게 발생했지만 이같은 기근이 발생한 사례가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이로 인해 양반의 몰락이 가속화됐고, 정치적으로 혼란이 심각해지면서 환국이 발생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소빙하기 도래
17세기 소빙하기가 발생했다. 지구의 평균 기온이 1℃ 정도 떨어진 것이다. 당시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빙하기에 접어드는 것에 대해 예측을 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기근이 발생했다. 인도는 데칸 대기근이 발생했으며, 일본 에도 막부에서도 칸에이 대기근, 엔포 대기근이 발생했다. 유럽에서는 마녀사냥이 횡행했는데 대기근의 영향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소빙하가가 도래하면서 조선땅에도 여러 가지 징후가 나타났다. 자연재해, 전염병, 해충 등이 발생햇다. 당시 한 여름에도 우박이 발생했고, 서리와 눈이 내렸다. 여름에 눈이 내렸다는 것은 사실상 작황은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8월에 비가 내렸는데 냉우 즉 차가운 비가 내렸다. 차가운 비가 내리기 때문에 냉해로 작물들이 말라 죽었다. 그리고 우박에 맞아 죽은 사람들도 속출했다.
이로 인해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이에 부모가 아이를 버리거나 사람을 잡아 먹는 사례가 속출했다.
소 도축 허용
그러다보니 조선 조정은 소 도축을 허용했다. 소는 농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동물이기 때문에 소 도축을 예외적인 상황 이외에는 도축을 금지했다.
하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 나가자 조정은 소 도축을 허용했다. 하지만 소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었기 때문에 도축할 소도 없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대기근이 닥치면서 인구 이동이 일어났다. 왜냐하면 작황이 이뤄지지 않으니 굶어죽을 바에는 한양에 가서 구걸이라도 하겠다는 심산에서 고향을 등지고 한양으로 향했다.
하지만 한양에 와서 보니 한양에도 먹을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인구가 집중되면서 오히려 전염병 전파가 더욱 가속화됐다. 이에 다시 한양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한양에도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 점차 만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청나라와 경계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고, 결국 백두산 정계비까지 세우게 됐다.
사그라드는 북벌론
경시대기근은 북벌론에도 사그라들게 만들었다.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등으로 인해 삼전도 굴욕을 맛봤던 조선 왕실은 효종과 현종에 들어서 북벌론을 꺼내들고, 군대를 양성했다.
하지만 경신대기근이 발생하면서 북벌울 주장했던 시하들이 앞다퉈 청나라로부터 쌀을 수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존심만 내세웠던 신하들이었지만 굶어 죽어나가는 백성들을 보면서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청나라 내부 사정이 우리보다 더 복잡했기 때문에 쌀을 수입할 수 없었다.
경신대기근 이외에도 숙종대 을병대기근이 닥치면서 조선 내부에 체제 불만 세력이 늘어났다. 이런 이유로 조선 정부는 호패법을 강화하고 오가작통법을 본격적으로 시행하게 됐다.
또한 그동안 논의만 됐던 대동법이 전국 단위로 시행하게 됐다. 경신대기근 이후 백성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대동법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경신대기근은 지역사회에 상당한 변화를 일으키게 되면서 지역과 지역의 이동이 점차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동안 고향땅을 한번도 벗어나지 못했던 백성들이 고향땅을 버리고 타지로 이동하는 사례가 증가한 것이다.
또한 추위를 견디기 위해서 온돌이 전구적으로 보급됐다. 온들이 흔해지면서 나무 땔감 수요량이 늘어나게 됐고, 삼림 자원이 급속도로 고갈됐다. 구한말에 민둥산이 많아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