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75년 9월 1일 국회의사당이 준공된 날이다. 이날을 기념해서 매년 9월 1일 정기국회가 열린다. 원래 12월 31일에 회기를 마치는 것으로 해서 9월 22일 정기국회가 열렸다.
하지만 국회의사당 준공이 9월 1일 이뤄지면서 그 이후부터 9월 1일에 정기국회가 열렸다. 그 이전까지는 조선총독부 건물, 부산임시수도 당시에는 경상남도청 부속건물을, 전쟁이 끝난 후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본관)을 사용했다.
이승만 정권 때 계획 세웠지만
이승만 정권 말기 백범광장 근처에 국회의사당 신축 계획을 세우고 기초공사를 했지만 5.16 군사정변으로 무산되면서 취소됐다.
해당 장소에 세우려고 했던 이유는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신궁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 철거된 채 터만 남아있었다. 따라서 신축하기도 좋을뿐더러 일본제국의 정신적 상징을 깔아뭉개고 독립국가의 국회의사당을 세운다는 상징성도 있었다.
하지만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여의도에 국회의사당을 세울 계획을 한다. 그리고 7년의 공사 끝에 1975년 완공했다.
국회의사당을 지을 당시 헐값으로 건축가들이게 맡겼다. 그러면서 건축설계에서 건축가들이 빠졌다.
1968년 건축 공모 초안에 ‘돔’이 없었다. 국회의원들이 “서양건축물에 돔이 없으니 웅장미가 떨어진다”고 반발했다. 가뜩이나 저렴한 가격에 건축설계를 맡겼기 때문에 반발한 건축가들은 어색할 정도로 큰 ‘돔’으로 설계를 했다. 그런데 국회의원들이 만족하는 반응을 보이자 당황했다는 후문도 있다.
이에 건축가들은 ‘돔’의 높이를 낮추는 선에서 마무리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중앙청(조선총독부)보다 높아야 한다’면서 한 층 더 올릴 것을 요구했고, 이에 지금의 국회의사당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런 돔 때문에 국회의사당 안에 태권브이가 있고, 위급할 때 태권브이가 출격한다는 소문이 나돌게 됐다.
기와지붕 요구
푸른 돔은 사실 구리로 건축 초기에는 붉은 색이었다. 산화가 되면서 푸르스름해졌다.
2006년 푸르스름한 돔을 황금색으로 바꾸자는 예산안이 국회 심사에 제출됐지만 비용이 너무 막대하게 든다면서 결국 통과되지 못했다. 만약 통과가 됐다면 국민적 반발이 거셌을 것이다.
돔을 해결하고 나니 이번에는 국회의원들이 기와지붕을 요구했다. 하지만 건축가들은 기와지붕을 올리게 되면 ‘상여’ 모양이 된다면서 반대했다. 이번에는 건축가들의 의견이 반영됐다.
기둥은 24개인데 이는 24절기를 나타내고, 전면에 보이는 기둥은 8개로 8도를 나타낸다. 앞에 배치된 암수 한 쌍의 해태 상은 화기를 막고 국회를 사기(邪氣)로부터 수호한다.
국회의사당 야간조명이 설치된 것은 2007년이다. 이에 매일 일몰 후부터 새벽 1시까지 국회를 밝히고 있다.
해태제과 백포도주 묻힌 사연
국회 정문에는 해태상이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백포도주가 묻혀 있다. 해태제과에서 기증한 것으로 2075년 개봉할 예정이다. 해태제과는 각각 36병과 72병을 기증했고, 이것이 묻혀 있다.
2075년은 1975년의 100년 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와인의 보관기간이 50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2075년에는 와인 개봉 행사만 할 것으로 보인다.
국회의사당에 대한 소문이 있는데 궁녀들의 무덤터였다는 소문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양말산이 있다는 것은 양과 말을 목축했던 장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2008년 4월 30일 국회 개원 60주년 명목으로 기념비를 세웠는데 남근석 논란이 일어났다. 일설에 의하면 풍수지리적으로 음기가 강해서 남근석을 세워 음기를 누르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논란이 일어나면서 현재 헌정기념관 뒤쪽 공터로 옮겨졌다.
관악구 봉천동과 서초구 방배동에는 각각 국회단지라는 이름의 마을들이 있었다. 이는 국회의사당 자리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이 해당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