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620년 9월 6일은 청교도인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대륙으로 항해를 시작한 날이다.
영국 성공회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대륙으로 향한 것이다. 그것이 아메리카 식민지의 시작이고, 오늘날 미국을 만드는 시초가 됐다.
물론 이들보다 13년 먼저인 1607년 도래해서 건설된 ‘제임스타운’도 있지만 미국 역사에서 ‘메이플라워호’는 의미가 상당히 깊다.
종교갈등의 서막
1527년 헨리 8세의 이혼 문제로 촉발된 교황과의 갈등은 1533년 잉글랜드가 종교개혁을 선포하게 됐고, 로마 카톨릭과 결별을 하게 됐다.
헨리 8세는 로마 카톨릭과 결별을 하면서 영국 교회 수장이 됐고, 첫번째 왕비 캐서린과 이혼을 한후 앤 볼린과 재혼했다.
그러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헨리 8세를 파문했다. 이에 1534년 영국 의회는 수장령을 공표하면서 영국 성공회를 국교로 삼았다.
로마 카톨릭과의 결별은 영국 전역에 종교개혁 운동이 번지게 됐다. 엘리자베스1세가 등극하면서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이 공존할 수 있는 중도 성향의 종교정책을 지향했다.
의식은 카톨릭을 따르되 교리는 칼빈주의를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엘리자베스 1세는 종교적인 문제를 정치적으로 풀어나가고자 했다. 하지만 급진개혁을 추구했던 청교도는 중도노선을 지향하는 성공회와 갈등을 빚게 됐다.
엘리자베스 1세 이후 1693년 제임스 1세가 즉위하면서 영국 성공회를 강력히 지지했고, 이에 청교도들은 실망하게 됐다.
그러면서 실망을 하게 됐고, 청교도들 중 일부는 1620년 9월 15일(율리우스력 9월 6일)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향하게 됐다.
메이플라워호는 화물선
메이플라워호는 프랑스 등 유럽 여러 나라와 영국 사이에 오갔던 화물선이었다. 승무원은 25~30명 정도 탑승했다.
여기에 신대륙으로 향했던 사람이 100여명인 점을 감안하면 대략 130여명 정도 탑승한 채 신대륙으로 향했다.
9월 16일(율리우스력 9월 6일) 영국인 102명이 잉글랜드 남서부 플리머스에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떠났다. 66일 간의 어려운 항해를 거쳐 그해 11월 21(율리우스력 11월 11일), 케이프코드 끝에 도착했다.
원래 목적지는 앞서 언급한 ‘제임스타운’이었다. 하지만 메이플라워호가 항로를 이탈했고, 계절은 겨울이었기 때문에 케이프코드에 머물면서 월동을 했지만 절반 가까이는 추위와 괴혈병으로 사망했다.
1621년 3월 31일(율리우스력 3월 21일), 겨울 동안 배안에서 살아남은 승객들은 플리머스 해안까지 이동했고, 메이플라워호는 그해 4월 15일(율리우스력 4월 5일)에 잉글랜드로 되돌아가게 된다.
메이플라워 서약 체결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사람들은 매사추세츠에 도착하기 전에 그 배에서 소위 메이플라워 서약을 체결하여, 질서와 안녕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하나의 시민정치체를 만들고 필요한 법률과 공직을 제정하여 이에 복종한다는 것을 서약했다.
이러한 식민지의회의 설치와 자치체의 형성은 그 뒤에 건설된 다른 식민지에도 도입됐다.[15]
내용은 영국 왕에 충성을 다하며,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할 것을 기약하고, 자치사회를 형성해 질서와 안전을 도모하며, 평등한 법률을 만들어 관제를 정한 다음, 여기에 종속할 것을 맹세한다는 것이었다.
‘메이플라워 서약’은 다수의 자유 의지에 의한 정부의 설립을 결정한 것으로서, 민주주의 정치의 기초가 됐다.
비록 제임스타운이 메이플라워호보다 13년 일찍 신대륙에 정착했지만 미국 역사에서 메이플라워호가 역사적 가치를 갖는 이유는 메이플라워호 서약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