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경주 최부잣집은 조선중엽부터 관통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집안으로 조선시대 최대 명문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경주 최부잣집은 비록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쇠퇴하고, 박정희 정권 때 영남대학교를 빼앗겼지만 그 집안의 명성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경주 최부잣집은 우리 사회에서 리더가 어떤 식으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집안이다.
최진립 장군의 명성
경주 최부잣집은 최진립 장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참전한 의병장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69세의 노구를 끌고 청나라 군대와 싸우다가 그해 12월 27일 용인 험천 전투에서 순절했다.
전사 1년 후 시신이 수습됐는데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박혀 있었다고 한다. 전투 시 자신을 따라온 몸종 ‘옥동’과 기별이 있었는데, 장군이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주인이 충신으로 나라에 몸을 바치려는데 어쩌 충노가 되지 못하리오라면서 남아 사우다가 함께 전사한다.
이에 그 충성심을 잊지 않고 지금까지도 최진립 장군의 후손들이 두 종의 제사를 함께 모시고 있다.
최진립 아들부터 본격적으로
최진립 장군 아들 최동량 때부터 본격적으로 가문의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최동량은 정부의 적극적인 황무지 개간과 수로시설 건설 장려 흐름에 맞춰 경주 내남면 이조리 일대 토지를 개간했다. 그러면서 형산강 물줄기를 끌어들여 수로시설을 건설했고, 모내기(이양법)을 도입했다.
그러면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는데 ‘마름’이라는 중간관리직을 두지 않았고, 소작료를 낮게 받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성과급제가 도입되면서 생산력을 증대시켰다.
경주 최부잣집의 기원으로 꼽는 사람이 최진립 장군의 손자 최국선이다. 최동량까지는 부의 축적을 이뤄냈다면 최국선부터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이때 도적떼의 침입을 받은 바가 있다. 이때 경험을 교훈 삼아 최국선은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이가 없도록 하라고 했다. 이에 곳간을 열어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시작했다.
지주들은 흉년이 들면 농민들의 땅을 싸게 사들여 재산을 불렸다. 하지만 최부잣집은 흉년에 땅을 사지 말라는 가훈을 세웠다.
또한 재산은 1만석 이상 넘지 않도록 했다. 집안 소유 토지가 1만석으로 제한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소작인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구조가 됐다.
이에 오히려 소작인들은 최부잣집 재산이 늘어나는 것을 원했고, 누군가 땅을 매각하려 한다면 앞다퉈 최부잣집에 소개할 정도였다.
경영학적으로 본다면 이윤을 극대화하기 보다는 일정 수준의 이윤을 유지하면서 지역주민들의 신망을 얻는 경영방식을 채택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런 신망이 최부잣집이 무려 12대 400여 년을 이어오며 부를 지키는 근간이 됐다.
이는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계열사는 늘어나지만 재벌 총수의 재산은 100억원으로 한정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계열사의 이익은 직원들에게 돌리게 되면서 직원들은 저마다 매물로 나온 회사를 재벌 총수가 매입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쇠퇴
이런 경주 최부잣집이 쇠퇴한 시기가 있었느니 12대손 최준 때부터이다.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자 최준은 가문의 전재산을 털어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에 경주군 대표로 참여해서 기부했다. 이에 1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햇다.
1921년 미국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에 조선 독립을 청원하는 청원서를 제출하면서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백산 안희제를 만나면서 안희제의 제안으로 백산상회에 투자하는 형식을 빌려 독립운동 자금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기부했다. 최준 동생들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해방 이후 백범 김구는 최준을 만나서 최준이 보낸 자금으로 독립운동을 하게 됐다면서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일제에게 빼앗긴 재산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최준은 남은 전재산을 털어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을 세웠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을 합쳐서 영남대학교로 통폐합시켰다. 영남대 법인은 학교법인영남학원이다. 그리고 설립자는 박정희이다.
이후 최준은 1990년 독립운동 활동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