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궁예는 후삼국 시대 후고구려, 태봉, 마진의 왕이다. 승려 출신의 군주이며, 왕건이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숙청당한 인물이다.
역사적 평가는 ‘폭군’으로 묘사돼 있다. 하지만 왕건과 그 후손들에 의해 기록된 역사서밖에 없기 때문에 궁예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평가를 할 수 없다는 점이 오늘날 궁예를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게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 안성에서 일으켜, 양길의 수하에 들어갔다가, 명주(현 강릉일대)를 평정한 후 태백산맥을 넘어 철원을 점령하고, 송악을 근거로 하는 패서 지방(평안도) 호족을 평정했다는 점에서 궁예와 패서 지방 호족들과의 신경전이 거세질 수밖에 없었다.
철원 점령하자 수도를 송악으로
궁예는 죽주(안성)의 기훤 밑에서 활약하다가 북원(원주)의 양길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양길의 군사를 이끌고 태백산맥을 넘어 명주(현 강릉)을 넘보게 됐다.
명주를 관할하던 김순식이 귀부를 하자 곧바로 태백산맥을 넘어 철원을 점령했다. 궁예 세력은 기훤 세력+양길 세력+김순식 세력이다.
김순식이 귀부를 했다고 하지만 명실상부하게 명주 일대를 다스리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철원 이외에는 궁예가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지역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왕건이 이끄는 패서지역 호족 즉 평안도 호족들이 귀부를 하면서 왕건은 자신의 근거지인 송악에 궁궐을 세우고 궁예에게 바쳤다.
궁예 입장에서는 이것이 패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진짜 근거지는 철원인데 수도를 송악으로 옮겼으니 패서지역 호족의 중심지에 들어간 셈이다.
자연스럽게 패서지역 호족들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 셈이다. 이런 이유로 훗날 태봉과 마진으로 국호를 바꾸면서 철원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철원이 가지는 지리적 문제점
문제는 철원이 가지고 있는 지리적 문제점이다. 한반도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지만 강이 없기 때문에 수상 교통이 불편했다.
비록 철원평야가 있기 때문에 경제적 풍요는 있지만 인구적인 기반이 취약한 것이 흠이다. 이런 이유로 청주 사람들을 대거 이주했다. 그런데 이런 이주가 과연 궁예의 친위 세력이 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즉, 궁예 입장에서는 패서 지역 호족들의 견제에 청주세력까지 얻혀지면서 좌불안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철권통치를 할 수밖에 없었고, 철권통치의 상징이 ‘관심법’이다.
귀족 중심 불교 타파
궁예가 군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귀족 중심을 불교를 타파하고 미륵 사상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존 미륵 신앙의 본산인 법상종과 대결을 하면서 석총 스님을 죽이게 된다. 이것이 귀족 중심의 불교는 물론 선종과도 갈등을 보이게 된다. 즉, 종교적으로도 자신의 지지 세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여기에 궁예가 경문왕의 서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정치적 기반은 더욱 약화됐다. 당시 한강 이북 쪽은 고구려 유민들이, 전라도는 백제 유민들이 각각 고구려와 백제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국호를 후고구려, 후백제로 한 것이고, 왕건도 고려라는 국호를 계승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궁계가 통일신라 경문왕의 서자라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것은 고구려 정신 계승자라는 정체성을 훼손시키는 것이 된다.
궁예가 단순 폭군이라서 축출됐다고 판단하기 보다는 여러 가지 상황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왕건 세력에게 축출될 수밖에 없었던 구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