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번다는 속담이 있다. 수고하는 사람 따로 있고 이익 보는 사람 따로 있을 때 빗댄 말이다.
‘곰 서커스’는 필경 국내에는 없었던 서커스이다. 독립신문 등에서는 청나라 상인이 원숭이를 데려다가 재주를 부리게 했다는 기사가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곰에게 재주를 부리게 한 곡마단은 없었다. 다만 청나라에 다녀온 실학자들이 그곳에서 곰이 재주를 부리는 그런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열하일기에 나오는 곰 곡마단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에는 곰 곡마단 이야기가 나온다. 열하일기는 박지원이 1780년 삼종형 명원이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칠순 잔치 진하사로 베이징에 가게 되자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수행하면서 곳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남긴 기록이다.
이 열하일기에 곰이 재주를 부리는 기록이 남아있다.
有行宮, 牢鎖, 不許觀. 還寓舘, 則門外賈客雲集, 持馬驢携書冊·書畵·器玩, 亦有弄熊諸戱. 而弄蛇弄虎者, 已罷去, 未及觀可嘆. 有賣鸚鵡者,
행궁(行宮)이 있긴 하나, 굳게 잠그고는, 구경을 허락하지 않는다. 객관에 돌아온즉, 문밖엔 장사치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는데, 말과 나귀에다 서책·서화·골동 등을 실었고, 곰을 놀리는 등 여러 가지 재주를 구경했다. 그러나 뱀 놀리는 자 범 놀리는 자도 있었던 모양이나, 벌써 흩어져 버렸으므로, 미처 보지 못해서 한스러운 일이다. 앵무새를 파는 자가 있으나,
日已昏 不得詳看其毛色 方覓燈之際 賣者已去 尤爲可恨.
날이 저물어서, 그 털빛을 상세히 볼 수 없으므로, 막 등불을 찾아오는 동안에, 그 자가 그만 가버려서, 더욱 유감이었다.
곰이 재주를 넘는 것을 목격한 것이 비단 박지원만은 아니다. 당시 청나라를 다녀온 실학자들은 마을 곳곳에서 곰 곡마단을 구경했던 것이 흔했다. 그것은 조선 땅에는 없는 구경거리였다는 점에서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되놈=여진족
되놈은 한족에 대한 욕이 아니라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만주족)에 대한 욕이다. 한자로는 島夷(도이) 즉 섬나라 오랑캐라는 뜻이다.
만주가 섬이 아니고 대륙의 일부임에도 섬(島) 한자를 사용한 것에 대해 불명확하지만 고구려나 발해 등의 입장에서 볼 때 만주족은 그야말로 섬에서 생활하는 듯한 모습이어서 그러지 않았겠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도이(島夷)라고 부른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고 중국 전역을 지배하고,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등을 일으켜 조선땅을 침범하면서 본격적으로 되놈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실학자 눈에는 그런 되놈이 곰에게 재주를 부리게 하고 돈을 챙겨가는 모습을 보았으니 아마도 그것은 청나라 현실을 그대로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되놈(만주족)이 곰(한족)을 부려서 이익을 챙기는 모습이 곰 재주 부리는 것에 투영됐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속담이 생겨난 것 아니냐는 추정이 가능하다.
열하일기에는 ‘되놈’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그것은 당시 만주족에 대한 경시하는 풍조가 실학자 내부에서도 깔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만주족이 중국에서 지배계층이 되고 한족이 피지배계층이 되면서 조선은 ‘소중화’를 내세웠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강조했다가 결국 청나라에게 무릎 꿇고 항복을 해야 했으니 실학자들 눈에 ‘곰이 재주를 부리는 것’이 남다른 모습이 됐을 것으로 보이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