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대통령실에서 영빈관을 신축하겠다면서 예산을 배정했다가 윤석열 대통령의 지시로 철회가 됐다. 그러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윤 대통령은 취임을 하면서 청와대를 개방했다. 그러면서 외빈을 접대했던 영빈관 역시 개방을 하면서 외빈을 어디에서 접대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영빈관 신축에 878억원의 혈세를 들여 새로 짓겠다고 발표를 했다. 하지만 혈세가 나간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그에 따른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그리고 결국 윤 대통령은 영빈관 신축에 대해 철회를 한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점차 사그라들고 있다.
광해군의 궁궐 사랑
광해군은 세자 시절 임진왜란의 영웅이었다. 선조가 왜군을 피해 도망가기 바빴다면 광해군은 전쟁터를 누비면서 관군과 의병을 독려했다는 점에서 선조와 비교가 된다.
아울러 임금 시절에는 대동법을 시행했고, 전후 복구를 하는 것은 물론 후금·명과의 중립적 외교를 했다.
그런 광해군의 궁궐 사랑은 대단했다. 광해군일기에는 군역으로 징발했다는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궁궐을 짓기 위해 군사를 징발한 기록들이 있다.
궁궐을 짓는데 군사들을 동원하면서 도성 내 군사가 3천명 이하로 떨어지게 되면서 호위를 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는 상소가 빗발쳤다.
또 악소배를 시켜 백성들의 소와 말을 빼앗아 자재를 운반하게 하고, 개성 근처의 각 군(郡)에서 장정을 징발해 벌목한 후 목재를 강물로 떠내려 보냈다. 이로 인해 농민들은 아예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됐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광해군은 완공이 지연되자 신하들에게 중형과 하사 했던 물품과 공시비용도 추징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아울러 백성들에게 구리와 철을 거두게 하면서 농기구가 남아나지 않으면서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호조에서 만류
오늘날 기획재정부에 해당하는 호조에서는 광해군 9년(1617년) 재정부족의 이유로 궁궐 공사를 만류했다.
백성들이 곤궁하고 재물은 고갈되면서 조석조차 급급한 상황인데 포목을 거두면서 백성들이 힘들다는 것이다.
광해군의 궁궐 사랑은 그야말로 병적이었다. 광해군은 즉위 직후 불타버린 종묘의 중건을 마쳤고, 선고 때 시작한 창덕궁 중건 사업을 재개하면서 광해군 3년 완성했다.
창경궁을 중수했으며, 돈의문 안에 경덕궁을 지었고, 이를 영조 때 경희궁이라고 불렀다. 또한 풍수에 따라 인왕산에 왕기(王氣)가 있다면서 인경궁을 짓고, 북학 자리에 자수궁을 지었다.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탔기 때문에 궁궐을 짓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광해군은 그 수준을 넘어선 것이다.
광해군이 궁궐에 미쳤다는 것은 청나라에서도 유명할 정도가 됐다. 그만큼 광해군이 궁궐 신축에 상당한 노력을 가했다.
인조반정 때 광해군 외면했던 신하들
사실 인조반정 때 인조반정에 가담했던 반정파에 가담했던 세력이 500~600명 정도였다. 하지만 도성을 지키던 군사가 앞서 언급한대로 3천명도 안됐다는 점에서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궁궐을 지키는 군사들이 궁궐을 짓는데 징발되면서 광해군을 호위하는 군사들이 모자른 것이다.
이와 더불어 당시 신하들 상당수가 외면을 했다는 점이다. 계유정난 당시 수양대군은 김종서을 처단한 후 단종의 명을 받아 신하들을 모두 불러들여 살생부에 따라 도륙을 했다면 인조반정은 군사를 일으킨 점이 완전히 다르다.
따라서 그 다음날 신하들이 반대를 한다면 인조반정이 실패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신하들 그 누구도 광해군을 두둔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궁궐 공사에 대한 피로감 때문이다.
궁궐 공사에 명나라 파병 요구까지 이어지면서 재정 확보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광해군은 이를 위해 특별 어사를 파견했다. 그러면서 마구잡이로 징수를 하면서 횡포를 부렸다. 이른바 백성의 고혈을 쥐어짰다는 것이다.
문제는 호남 등지에서 심각한 기근이 발생하면서 백성들은 아우성이었다. 백성의 고혈을 쥐어 짜던 특별어사들도 오죽하면 “나는 도둑질하는 신하이고, 하루를 이 자리에 있으면 하루의 죄악을 더할 뿐”이라고 하소연했다.
그러니 이들에게 인조반정은 희소식이나 다름 없었다. 굳이 광해군을 두둔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