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875년 9월 20일은 일본 해군 군선 운요호가 조선 해안 탐사를 빙자해 강화도와 영종도를 습격한 사건이 발발한 날이다.
해당 사건으로 인해 조선은 수도 한양까지 일본 군대가 쳐들어올 수도 있다는 충격을 안게 되고, 일본의 개항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됐다.
운요호 사건의 충격은 훗날 굴욕적인 각종 외교 조약 등에 영향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것은 굴종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노골적인 제국주의 야욕 보여
일본은 봉건적인 막부 체제의 막을 내리고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 분위기를 형성하게 됐다. 그러면서 조선 침공에 대한 노골적인 제국주의적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정한론까지 가세하게 됐다.
하지만 정한론자들 역시 조선의 위력에 대해 아직 정확하게 파악을 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운요호를 통해 조선에 접근했다.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고수했지만 최익현의 탄핵 상소로 하야를 해서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됐다.
이에 일본은 군선 운요호를 부산으로 밀파하게 된다. 당시 부산 훈도였던 현석운이 부산 주재 왜관을 항의 방문했다. 운요호 함장 이노우에 소좌는 “일본과 조선 간의 상호 통상을 위해 방문하였으며 조선의 해안을 탐사하러 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부산을 지나 남해안을 거쳐 서해안으로 북진했고, 9월 20일 강화도 초지진 앞바다에 도착했다.
경고 포격 날리다
이노우에 소좌 등은 일본군 단정을 타고 강화도로 접근을 했다. 그러자 조선군은 돌아가라는 명령과 함께 포격을 가했고, 단정은 소총으로 응사를 하면서 운요호로 돌아갔다. 이로써 운요호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날인 9월 21일 운요호는 강화도에 접근하면서 함포를 발사했고, 조선 수군과 교전이 벌어졌는데 초지진은 파괴됐다.
그리고 지금의 인천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에 기급 상륙해서 조선 수군과 교전을 벌여 근대식 대포와 무기로 조선 수군을 궤멸시켰다. 그리고 조선군 대포 35문과 기타 무기를 노획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 수군 전사는 35명, 포로 16명이었고, 일본 해군은 2명의 경상자만 냈다. 그리고 강화도로 이동해 조선 조정에게 이 사건의 책임을 물었다. 그러며서 이듬해 강화도 조약이 맺어졌다.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은 훗날 을사조약이나 경술국치 같은 사건의 단초가 됐다. 일본과 불평등한 강제적 조약을 맺게 되면서 일본에게 조선 침탈의 빌미를 제공해준 것이다.
조그마한 군선에 패배한 원인
그런데 운요호는 사실 조그마한 군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수군이 대패를 했다는 점이다.
운요호 한 척이 250톤이고, 판옥선이 200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운요호가 조그마한 군선이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통해 프랑스와 미국도 물리친 조선 수군이 일본의 조그마한 군선을 물리치지 못했다는 것은 엄청난 충격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조선 수군이 허약해졌다는 점이다. 신미양요 당시 강화도 5개 요새가 함락당했고, 당시 빼앗긴 대포가 500문 가량인데 이 대포가 당시 조선 최고 화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총기가 2만여정을 빼앗겼다.
즉, 조선 수군으로서는 그 다음 양인(洋人)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신미양요가 끝난 후 4년이 지난 시점에서 운요호가 쳐들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수군이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것도 신미양요의 후유증이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대포를 만들거나 총기를 만드는데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고, 수많은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
따라서 강화도에 포진해 있던 조선 수군은 말이 좋아 수군이지 칼이나 창 등을 가진 구식 군대나 다름 없었다.
더욱이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증건을 위해 당백전을 발행하면서 경제가 휘청거렸다. 흥선대원군이 축출된 이후에도 조선 왕실 창고에는 돈이 없었다.
즉, 강화도에 포대를 만들고 대포를 설치하고 총기를 만들어낼 돈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운요호라는 조그마한 배로 침범한 것을 제대로 막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운요호 사건이 조선에 상당한 충격을 안겨줬다. 일본이 언제든지 큰 배로 쳐들어올 수도 있다는 공포감을 심어주게 만들기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