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의자왕 그리고 삼천 궁녀
[역사속 경제리뷰] 의자왕 그리고 삼천 궁녀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9.21 13: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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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드라마 대왕의 꿈 한 장면.
KBS 드라마 대왕의 꿈 한 장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 하면 ‘삼천 궁녀’가 떠오른다. 하지만 삼천 궁녀는 문학적인 수사에 불과하다는 것이 역사경제학자들의 주장이다.

백제가 삼천 궁녀를 거느릴 정도의 인구나 경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궁녀라는 직업이 현대 이전에 여인이 가지는 가장 최고의 직업이기 때문에 고임금 직업이다.

이런 이유로 삼천 궁녀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했다. 아무리 호남 평야를 갖고 있었던 백제라고 해도 삼천 궁녀를 먹여살리기란 상당히 힘들었다. 또한 그만한 상업이 발달한 것도 아니다.

tvN 알쓸신잡 한 장면.
tvN 알쓸신잡 한 장면.

삼천 궁녀는

삼천 궁녀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삼국유사에서는 의자왕과 후궁들이 바위에 뛰어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의자왕이 중국에서 죽었기 때문에 잘못된 이야기라고 기술했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낙화암과 백제를 소재로 글을 남기면서 ‘삼천 궁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것은 ‘삼천’이라는 숫자가 갖는 의미다. ‘삼천’이라는 숫자는 ‘무한대’를 의미한다.

삼천명의 궁녀를 거느린 국가는 역사상에 사실상 없었다. 물론 1만명의 궁녀를 거느렸다는 중국의 기록이 있지만 역사경제학자들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백제 말기 수도 사비성의 인구는 대략 5만명으로 추정된다. 5만명의 절반이 여성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어린이와 노인을 제외하면 궁녀가 될 수 있는 여성은 1만 5천명에서 2만명 정도가 된다.

문제는 이들 모두가 궁녀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3천 궁녀를 두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고려 왕조에서 자신의 계모까지 범한 막장 임금 충혜왕의 경우 궁녀가 100명이었고, 조선시대 연산군이 1천명이었다. 조선왕조는 궁녀 숫자를 600명 정도 유지했다.

고려와 조선시대보다 인구가 적은 백제가 삼천 궁녀를 거느렸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호남평야 고려하면

물론 우리나라에서 가장 기름진 땅인 호남평야를 갖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백제 당시에는 직파법 즉 땅에 직접 볍씨를 뿌리는 방식이기 때문에 생산량이 조선시대보다 낮았다.

쌀 생산량이 조선시대보다 낮았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력이 조선시대보다 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천 궁녀를 먹여살리기 위해서는 의자왕이 막대한 경제적 부를 가져야 하는데 조선시대보다 경제적 부가 많을 가능성은 낮다.

게다가 삼천 궁녀가 먹는 것만 할 수 없고 입고 쓰는 생필품 등의 보급이 필요하다. 그러자면 사비성이 상업 도시가 돼야 한다. 그것은 조선시대 한양보다도 상업이 더 발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시대가 상업을 천시하는 국가라고 해도 고려시대 이전보다도 상업은 더욱 발달했다. 그것은 시전상인, 칠패 그리고 보부상 등을 통해 전국 팔도에서 물자가 유통됐기 때문이다.

사비성이 아무리 넓고 상업이 발달했다고 해도 조선시대 한양만큼 물자의 유통이 불가능했다. 물론 당나라와 왜를 연결하는 해상무역이 발달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조선시대에 비하면 다소 미약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삼천 궁녀의 생필품을 조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tvN 알쓸신잡 한 장면.
tvN 알쓸신잡 한 장면.

의자왕은 왜 당나라에 항복했나

또한 오늘날 역사학자들에 의해 뒤집히는 학설 중 하나가 의자왕이 당나라에 항복한 것은 부하의 배신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동안 의자왕은 사치에 의해 몰락한 암군으로 취급했지만 실제로는 암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구당서 기록에는 ‘대장 예식(禰植)’이라는 인물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했다는 기록이 있다. 2010년 중국에서 예씨 집안의 가족묘가 발견됐는데 손자 예인수의 묘지명에서 조부(예식진)가 의자왕을 잡아다 바쳤다는 기록이 나왔다.

기벌포 해전에서 패배하고 사비성이 함락 당하자 웅진성으로 피신했던 의자왕은 항전 의지를 불태웠다는 것이 여러 역사 기록에 나타난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당나라에 항복을 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최근 역사학자들은 의자왕이 스스로 항복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는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웅진성 수비대장이 의자왕을 잡아 항복했는데 이때 의자왕이 자살하려고 스스로 칼로 목을 찔렀지만 동맥이 끊이지 않아서 죽지도 못하고 소정방에게 끌려 갔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상고사가 논란이 많은 역사기록이기 때문에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예씨 집안 묘지명이 나오면서 점차 힘을 실어주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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