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53년 10월 11일 우리나라가 최초로 개발한 군용기 부활호가 시험 비행에 성공했다. 부활이라는 이름은 이승만 대통령이 하사했다.
부활호는 연락, 정찰, 심리전 등 다목적 항공기로 개발됐지만 1960년대 사라졌지만 이후 복원 작업이 이루졌고, 2008년 10월에는 등록문화재 411호로 지정됐다.
부활호 개발이 이뤄졌기 때문에 오늘날 KF-21 개발 등도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부활호는 우리나라 항공방위산업에 있어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전쟁이 한창이었던 1953년 6월 공군기술학교 제3대 교장으로 부임한 김성태 대령이 기술학교 정비교육대에 경비행기 설계 제작을 지시했다.
복적은 기술학교에서 근무하는 기간장병들과 피교육 중이던 훈련생들의 항공기술과 관련된 실험과 연구를 위해서이다.
이에 공군기술학교 정비교육대 정비과장 이원복 소령을 중심으로 교관과 조교들로 구성된 27명의 제작요원들이 개발에 참여하게 됐다.
개발은 공군사천기지 격납고에서 이뤄졌다. 다만 당시 항공산업 기반이 전무했기 때문에 개발에 사용된 부품은 기지 내 기존 항공기에서 빼낸 것이나 잉여 자재, 미군의 협력 하에 구한 것으로 사용했다.
동체와 날개 등 기체 구조물은 스스로 설계 및 제작했다. 알루미늄 합금 골격재와 판재를 사용했고, 조정석 일부는 나무로 만들어졌다. 이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10월 10일 기체를 완성했다.
드디어 시험비행에
10월 11일 시험비행이 이뤄졌는데 민영락 소령이 조종을 맡았고, 이원복 소령이 후방석에 동승했다. 오전 10시께 비행을 시작했고, 약 2시간 동안 비행했다.
이후 공군본부의 지시로 부활호는 대구 동명비행장으로 공수돼 최용덕 제2대 공군총참모장을 비롯한 공군 지휘부의 시찰을 받았으며 이때 평가를 위해 김신 작전국장이 시승하기도 했다.
1954년 4월 3일 공군김해기지에서 부활호의 명명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때 이승만 대통령이 復活이라는 휘호를 친필로 하사했다. 하지만 부활이라는 휘호가 갖는 정확한 의미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부활호가 이후 어떤 식으로 활용됐는지는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1960년대까지 공군기술학교에서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1960년 10월에는 공군기술교육단에서 폐기처분하려던 것을 당시 대구시 대명동 101번지에 있던 한국항공대학에 이관됐다. 한국항공대학은 1963년 한국항공초급대학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66년 2월 28일에 폐교됐다. 그리고 1967년 3월 2일에 같은 자리에 경상공업고등학교가 개교하게 됐다.
이후 부활호는 분해되면서 심각하게 훼손됐으며 수십년 동안 창고에 보관돼 잊혀진 존재가 됐다.
이름처럼 부활
잊혀진 부활호가 다시 깨어난 것은 1980년대 중엽 이후 항공우주 과학자들과 국방과학기술자 등의 저술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부활호 제작을 총지휘했던 이원복은 부활호를 찾으려고 했지만 찾지를 못했다고 한다. 그 이후 2003년 12월 중앙일보는 이원복과 연락이 닿게 되면서 12월 17일자에 사라진 부활호를 찾는다는 기사를 내보내게 된다.
이에 경상공업고등학교에서 1974년까지 서무과장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 이방치라는 사람이 경상공업고등학교 창고에 비행기가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제보하게 된다.
이후 2004년 1월 13일 부활호 제작 당시 판금작업을 맡았던 문용호(文龍浩, 당시 계급 일등중사)와 함께 경상공업고등학교 제도실 건물 지하창고에서 부활호를 찾아낸다. 발견 당시 부활호는 외피가 거의 없이 뼈대만 남아 있었으며 날개, 엔진, 프로펠러 등 주요 부품이 모두 사라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카울링의 친필 휘호가 반쯤 벗겨진 채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부활호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부활호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2004년 1월 15일자 중앙일보에 실림으로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이후 부활호가 복원됐고, 2008년 10월 1일에 등록문화재 411호로 지정됐다. 2008년 10월 23일에는 이를 기념하여 설계자 이원복의 흉상 제막식이 열렸다. 2020년 7월 1일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의해 국가중요과학기술자료 산업기술-4(2020)호로 지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