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의 발단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은 1894년에 일어난 사건이다. 임오군란으로 인해 청나라 군대가 조선땅을 밟자 일본군 역시 조선땅을 밟았다. 이에 톈진조약을 통해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물러나면서 만약 조선땅에 군대가 들어가게 된다면 상대 국가에 통보한다는 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면서 조선 왕조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파견할 것을 요청했고, 청나라 군대는 아산만으로 진격하면서 일본에 이를 통보했다. 그러자 일본 역시 군대를 보냈는데 제물포에 상륙을 했다. 이는 한양을 노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3시간 전투
동학농민군은 우리 땅에 외국 군대가 들어오는 것에 대해 우려하면서 조선 왕조와 전주화약을 맺었다. 그리고 조선땅에서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 모두 나가라고 통보를 했다. 6월 12일 일본군 혼성제9여단 선발대, 6월 16일 혼성 제9여단 4천명이 제물포에 상륙했다. 그리고 6월 23일 한양으로 진군해 일부는 용산에 주둔하고 일부는 한양 시내에 진군했다. 당시 조선군 경군의 상당수는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한양을 비워둔 상태였기 때문에 장위영(壯衛營)과 통위영(統衛營) 병력 일부, 평양기영(平壤箕營) 병력 일부에 불과했다 7월 23일 0시 30분 용산에 있던 일본군 제5사단 혼성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는 경복궁 점령 작전을 전개한다. 새벽 4시 경복궁을 포위한 일본군은 영추문을 통해 궐내에 진입하려고 했다. 이에 일본군 공병대가 폭탄을 설치해 영추문을 폭파하려고 했지만 실패가 됐고, 영추문을 경비하던 평양 기영병 군대와 교전을 벌이게 됐다. 반대편인 건춘문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광화문 일대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새벽 5시가 되면서 영추문의 평양 기영병이 제압되면서 일본군은 궐내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광화문에 있던 장위영 병사들 역시 일본군에게 돌파당하고 만다. 일본군은 고종의 신병을 확보하기에 이르렀고, 고종을 위협해서 전투를 끝내려고 했다. 하지만 조선군은 야포까지 끌고 와서 궁궐을 포위시키려고 했다. 문제는 고종의 가짜 명령서를 만들어서 조선군을 무장해제 시켰다. 조선군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통곡하면서 해산을 했다. 만약 이때 가짜 명령서를 무시하고 궁궐로 진입을 했다면 역사는 또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해석도 있다. 일본군은 결국 김홍집의 친일 내각을 구성하고 청나라로부터 독립선언을 하고 갑오개혁을 하라고 요구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