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이재용 계란 투척
[오늘 통한 과거리뷰] 이재용 계란 투척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12.01 1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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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1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회계부정·부당합병' 1심 속행 공판에 출석하고 있는 가운데 누군가 계란을 던지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1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회계부정·부당합병' 1심 속행 공판에 출석하고 있는 가운데 누군가 계란을 던지고 있다./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1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삼성 부당합병 의혹’과 관련 79차 공판에 출석하던 중 누군가 던진 계란에 맞을 뻔했다. 계란세례를 하는 이유는 상징성과 실용성 때문이다. 상대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으면서도 상징성을 최대한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흰자와 노른자가 옷에 묻게 되면 불쾌한 흔적이 남는다. 아울러 투척자로서는 형사적 처벌이 가볍다는 장점이 있다. 사실 인류의 역사에서 계란 뿐만 아니라 각종 음식을 통해 항의 표시를 해온 역사가 길다. 다만 동양은 음식물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음식물을 던지는 것을 금했다. 이러 이유로 가끔 드라마 등에서 채소를 탐관오리에 던져서 항의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아울러 동양은 탐관오리를 사적으로 단죄할 수 없기 때문에 백성들이 탐관오리에 음식물을 던져서 단죄하는 것은 사실과 많이 다르다.

고대 로마에서는

음식물을 던져서 항의 표시를 하는 것은 서양에는 사례가 많이 발견된다. 고댈 로마 4대 황제 클라디스는 식량부족 사태로 인해 로마 사람들에게 빵 조각 세례를 받아야 했다. 오늘날 빵을 생각하면 별다른 피해가 입지 않았을 것으로 착각하지만 고대 로마에서 빵조각은 거의 돌덩어리처럼 단단하다. 따라서 돌을 던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9대 황제 베스파시아누스는 아프리카 총독 시절 긴축정책에 화난 군중으로부터 순무 세례를 받았다.
민정당 노태우 후보 광주유세에서 경호원들이 '신종장비'인 투명 플라스틱 방패로 날아오는 돌멩이, 각목. 쇠붙이 등을 막아 내는 가운데 노 후보가 시위 군중들 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민정당 노태우 후보 광주유세에서 경호원들이 '신종장비'인 투명 플라스틱 방패로 날아오는 돌멩이, 각목. 쇠붙이 등을 막아 내는 가운데 노 후보가 시위 군중들 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세시대가 갖는 계란의 의미

음식물 항의는 중세시대에는 오히려 축제용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용을 하지 않았다. 아울러 계란은 생명의 상징성으로 사용했다. 그것은 기독교의 부활절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란 세례 같은 행위는 중세시대에서는 이뤄지지 않았다. 계란은 기독교와 연결됐기 때문에 항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중세를 지나면서 점차 계란 세례 사례가 발견되기 시작했다. 17세기 영국에서는 계란이 종교분쟁 시 타 교파의 성직자들에게 투척하는 수단이 됐다. 19세기 미국에서는 노예해방론자 존 그린리프 휘티어와 조지 톰슨은 노예해방 연설을 마친 후 군중들로부터 계란과 돌을 맞았다는 기록이 있다. 토마토는 16세기 남미에서 유럽으로 들어오면서 처음에는 관상용으로 재배됐지만 17세기 이탈리아에서 음식 재료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17세기 북미에서 배재가 시작되면서 토마토가 풍부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토마토가 계란과 더불어 항의의 음식으로 변질됐다. 19세기 노예 폐지 운동이나 20세기 초반 여성 참정권 운동 등에서 토마토 세례를 받은 사례가 발견된다. 1830년대 흑연 여성 마리아 스튜어트가 연설 도중 흑인 남성들로부터 토마토 세례를 받은 기록이 있다. 1912년 런던 여성 참정권자들에게 경찰과 군중들이 토마토를 던지며 야유를 퍼부었다.

항생제 발명되면서

19세기 양계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 그 이전까지 닭은 집집마다 소규모로 양계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19세기 들어서면서 양계산업은 대형화가 됐다. 수천마리를 사육하는 양계농장이 속속 등장하면서 계란 가격이 저렴해지기 시작했다. 아울러 20세기 들어오면서 항생제가 발명됐고, 이에 양계산업은 더욱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여기에 품종개량까지 이뤄지면서 계란의 가격이 저렴해졌다. 계란의 가격이 저렴해지면서 일부 사람들만 먹을 수 있었던 계란이 집집마다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미국 마피아 알카포네가 신선한 우유 배달 시스템을 만들면서 덩달아 신선한 계란도 각 가정에 배달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계란의 보급을 보편하화면서 계란 투척이 보다 보편화되기에 이르렀다.
정원식 국무총리가 한국외국어대학교에 방문했다가 학생들에게 계란과 밀가루 세례를 받았다고 대서특필한 당시 언론 기사.
정원식 국무총리가 한국외국어대학교에 방문했다가 학생들에게 계란과 밀가루 세례를 받았다고 대서특필한 당시 언론 기사.

우리나라에서는

우리나라에서도 계란 세례가 등장한 것은 1957년 4월 15일 진보당 결성대회에서 계란 세례가 처음 등장한다. 1965년 야당 의원들은 일본과 수교 협상을 하려고 출국하던 이동원 외무장관을 제2 이완용이라면서 계란 투척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 이후 폭압과 압제 때문에 계란 투척 항의를 볼 수 없었다. 계란 세례는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재등장 했는데 유명한 1987년 10월 노태우 당시 대선 후보가 광주를 방문했을 때 계란 세례를 받은 것이다. 물론 돌멩이, 쇠붙이 등도 날아왔다. 1991년 외대 학생들이 정원식 총리에게 전교조 교사 해직에 대한 항의로 계란과 밀가루 세례를 투척했다. 당시 노태우 정권이 강경대 학생 치사사건 등으로 수세에 몰렸는데 정원식 총리가 계란과 밀가루 세례를 받은 장면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면서 여론이 급반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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