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자체 핵무장 가능성을 언급했다.
윤 대통령이 지난 11일 국방부 업무보고에서 “대한민국이 전술핵을 배치한다든지 자체 핵을 보유할 수도 있다”며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 과학기술로 더 빠른 시일 내에 우리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대통령실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미국이 서울을 위해서 뉴욕을 희생할 수 있겠냐고 언급했다.
이는 샤를 드골 전 프랑스 대통령이 미국 핵우산을 의심하면서 파리를 위해 뉴욕을 희생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박정희 핵무장 역사
사실 우리나라 핵무장 역사는 상당히 긴 편이다. 1955년 북한이 ‘핵물리연구소’를 창설하고 1956년 소련과 원자력협정을 체결했고, 1962년 소련으로부터 연구용 원자로인 IRT-2000를 반입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 치하인 1969년 7월 닉슨 독트린이 발표됐다. 그리고 8월 닉슨 대통령은 주한미군의 철수 가능성을 제기했다.
박정희 대통령으로서는 미국을 위해 베트남에 군인까지 보냈는데 배신을 당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자체 핵무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1970년 무기개발위원회와 국방과학연구소가 설립됐고, 무기개발위원회에서 핵무기 개발이 만장일치로 가결됐다.
1973년부터 핵무기 개발이 본격화됐다. 그리고 미국은 1973년 우리나라의 핵무장 동향을 처음 파악했다.
핵무장을 위해서 1972년 최형섭 당시 과학기술처 장관이 프랑스를 방문했고, 1973년 김종필 당시 총리가 프랑스를 방문했다.
1975년 프랑스 국영원자력기업 SGN과의 재처리 기술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핵개발이 눈앞에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오원철 당시 청와대 수석이 캐나다를 방문해 플루토늄 추출이 용이한 캔두(CANDU) 원자로의 도입을 진행했다. 캔두 원자로가 도입된다는 것은 사실상 핵무장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나이키-허큘리스 미사일의 도입과 국산화를 진행했다.
프랑스에서 재처리 시설, 캐나다에서 중수로, 미국에서 발사체 기술을 확보함으로써 핵무장을 완성시킨다는 것이다.
창원에 종합기계공단
여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중화학공업화정책을 선언하면서 경남 창원에 종합기계공단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그 이유는 핵개발의 핵심을 담당한 기업인 현대양행이 창원에 소재했기 때문이다.
해당 선언 이후 창원에 원자로 제조시설이 들어서기로 돼있었다. 핵무장과 더불어 중화학공업을 육성한다는 계획인 것이다.
이같은 움직임을 보이면서 미국은 끊임없이 박정희 정부에게 핵무장을 중단하라는 압박을 가했다. 심지어 주한미국대사관 직원들과 CIA 요원들이 따라붙어 중단 압력을 가했다.
이에 1975년 박정희 정권은 핵확산금지조약에 서명했고, 캔두 원자로인 월성 1호기가 무사히 착공했다.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 압력에 굴복했다.
이후 프랑스와의 재처리협정은 파기됐고, 1977년 핵개발이 중단됐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한국이 핵무장을 시도한 적은 없다고 세계에 알리기까지 햇다.
하지만 이는 명목상이고, 오원철 수석에 따르면 프랑스의 재처리기술을 이미 확보한 상태이고, 핵심 기자재들을 밀반입하는데 성공했다.
공식적으로는 핵무장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비공식적으로는 핵무장을 추진하고 있었다. 다만 10.26 사건이 발생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전두환 정권 들어서서
10.26 사건이 발발한 후 전두환 세력은 12.12 쿠데타를 통해 군부를 장악하고, 5.17 군사반란을 통해 민심을 통제하면서 실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미국에게 합법정부로 인정받기 위해 핵개발을 전면 중단시켰다.
일설에 의하면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방한이 임박했으며, 카터 대통령이 경남 창원에 건설 중인 원자로 제조시설을 둘러보려고 했다.
이를 두고 박정희 정권 내에서 어떤 식으로 처리를 해야 할 것인지 고민을 하다가 결국 10.26 사건이 터진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다만 10.26 사건은 김재규와 차지철의 권력 다툼에 의해 발생했다는 것이 정설이기 때문에 핵무장을 가리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했다는 것은 힘을 얻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