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부모 묘소가 훼손된 사실이 알려져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이 대표가 자신의 SNS를 통해 “후손들도 모르게 누군가가 무덤 봉분과 사방에 구멍을 내고 이런 글이 쓰인 돌을 묻는 것은 무슨 의미냐”고 따졌다.
그러면서 “봉분이 낮아질 만큼 봉분을 꼭꼭 누르는 것(봉분 위에서 몇몇이 다지듯이 뛴 것처럼)은 무슨 의미냐”고 언급했다.
이 대표가 공개한 돌의 사진에는 생(生), 명(明) 등의 한자가 적혔다. 마지막 글자는 흐릿한 탓에 정확하게 식별되지 않았지만 ‘살(殺)’이라고 적힌 것으로 보인다.
오페르트 도굴사건
이로 인해 오페르트 도굴 사건이 생각난다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이다.
독일 함부르크 출신 유대인 상인, 학자 에른스트 야코프 오페르트가 1868년(고종 5년), 충청도 덕산군(현 예산군 덕산면)에서 흥선대원군의 생부인 남연군 이구(李球)의 묘를 도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을 말한다.
오페르트 일행이 1866년 2차에 걸쳐 조선에 통상을 요청했으나 실패하고 돌아갔으며 1868년 다시 조선땅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를 하면서 뭐라도 가져가기 위해서 남연군 묘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낡이 밝으면서 주민들이 몰려오자 퇴각했다.
남연군 시신 갖고 통상 요구?
이날 도굴을 한 이유에 대해 훗날 법정에서 진술한 바에 따르면 조선은 시신을 중요시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시신을 갖고 통상요구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법정에서의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조선은 무덤을 만들면서 소장품을 넣는다는 사실을 서양사람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묘를 파서 부장품을 갖고 가기 위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쨌든 오페르트 일당이 도굴에 실패한 이유는 조선의 묘지 시스템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석회가 굳으면서 콘크리트보다 더 단단해지면서 그에 따라 묘지를 더 이상 도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페르트 일당은 영사관으로 소환당해 조사를 받았으며 미국 주도하에 이루어진 영사 재판에서 오페르트와 젠킨스가 모두 기소 당했으나, 혐의 및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오페르트가 해군 제독을 사칭한 사실이 프로이센에 딱 걸려서, 오페르트는 본국으로 소환, 또 재판을 받고 실형을 언도받아 옥살이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