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백여년의 싸움
대표적인 산송으로 유명한 것은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의 일명 윤관 장군 묘지 싸움이다. 윤관 장군이 사망을 했지만 묘지를 어디에 썼는지를 모르고 있다가 영조 39년(1763년) 영조에게 상소가 날아들면서 출발했다. 부사직 윤면교 등 파평 윤씨 일가가 상소를 올렸는데 잃어버렸던 윤관 장군 묘를 찾았다면서 나라로부터 확증을 받고 싶다는 내용을 담았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윤관 장군 묘가 경기도 파주 분수원 북쪽에 있다고 기록돼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윤동규라는 사람이 1747년 심씨 문중 묘역에 ‘선략장군 이호문 묘’라는 비석이 있는 것을 의심했다. 해당 선산은 1614년 청송 심씨 문중의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이 이곳에 부친의 묘를 조성하면서 청송 심씨의 선산이 됐다. 그런데 청송 심씨 선산에 ‘이호문 묘’가 있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윤동규가 인근 노인들을 탐문했고, 이호문의 손자 이형진이라는 사람을 찾아내 심문한 결과 청송 심씨의 암장을 눈가림 하기 위해 허묘의 비를 세웠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는 것이 윤동규의 주장이다. 이에 파평 윤씨 문중의 운면교가 소두가 돼서 상소를 올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영조 입장에서는 이호문의 비만 철거시키라는 명을 내렸다. 왜냐하면 해당 묘가 윤관 묘라는 물증이 없기 때문이다.2차 상소로
파평 윤씨는 계속해서 이호문 묘를 예의주시했고, 묻혔던 비석 조각을 찾아내서 영조 40년에 2차 상소를 올렸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영조는 양측 문중의 대표격으로 심청최와 윤희복을 불렀다. 그런데 윤희복이 영조를 향해서 "대왕께서도 문숙공(윤관 시호) 외손이 아니십니까"라고 따졌다. 이에 영조는 진노했고, 곤장으로 다스리자 윤희복은 목숨을 잃었다. 파평 윤씨 가문에서 왕비가 많이 배출됐기 때문에 윤희복은 그것을 따졌지만 영조 입장에서는 격노하게 만들었다. 윤희복이 사망하자 파평 윤씨는 전국의 종친들에게 통문을 띄워, 윤관 묘로 집결하라고 호소했다. 이에 청송 심씨는 파묘를 할까 두려워 인원을 동원했고, 이에 영조는 도승지를 급파해서 사태를 진정시켰다. 그러나 두 문중의 충돌은 매년 10월 이뤄졌고, 연중행사가 됐다. 1860년 10월에는 윤면갑이 쇠망치로 심씨 묘소 비석을 부순 사건이 발생했고, 청송 심씨 역시 똑같이 앙갚음을 했다. 청송 심씨 종손이 구한말 시절 토지를 일본인에게 팔아 넘기자 파평 윤씨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진정서를 내서 매매계약 무효라는 승인을 받아내기도 했다. 그러자 청송 심씨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사패지임을 주장하는 소유권 확인 소송이 제기됐다. 그러나 산림 4만평이 윤씨 문중으로 넘어갔다. 광복 이후에도 윤씨는 게속해서 청송 심씨 묘를 파헤치려고 했고, 그때마다 형무소에서 징역살이를 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육군 모 사단장으로 윤씨 가문이 되자 휘하 장병을 거느리고 윤관 묘 뒤쪽에 높은 콘크리트 벽을 쌓아버렸다. 그리고 1972년 윤관 장군 묘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2006년 4월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는 극적인 화해를 하기에 이르렀다. 청송 심씨 측 조상 묘 19기를 이장하는 대신 파평 윤씨 측에서는 이장에 필요한 부지 2천500여평을 제공한다는 조건에 합의를 한 것이다. 이로써 400년 넘은 산송이 마무리 됐다. 아울러 번외로 윤관 장군 묘는 현재 북한에 위치해 있다는 주장도 나왔었다. 세종실록지리지 혹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나와 있는 기록에는 현재 북한 땅으로 기록돼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후대에 이장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학계의 입장이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