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경제의 혁명으로
고려말 문익점이 원나라로부터 목화씨를 가져온 것이 조선시대 백성들의 삶에 가장 큰 변화를 일으켰다. 조선전기 학자 조신(曺伸)이 기록한 ‘소문쇄록(謏聞瑣錄)’에는 ‘목면’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면화는 민광(閩廣 지금의 복건성 광동성 일대)과 교지(交趾 지금의 베트남) 등지에서 나는데, 고려말 진주사람 문익점이 중국에 갔다가 목면의 씨를 구해 주머니 속에 감춰 넣고, 씨 뽑는 기구와 실 잣는 기구를 가져왔다고 기록돼 있다. 이어 사람들이 다투어 그 방법을 전해 1백년도 못돼 온 나라에 퍼져 지체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대체로 이 무명옷을 입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익점의 공이 황도파(黃道婆)에 못지 아니하여 나라에서 그 자손을 기용했다고 했다”고 밝혔다.무명이 화폐로
조선 초기에는 화폐가 사실상 없었기 때문에 쌀이나 무명이 화폐 대용이 됐다. 즉, 목화씨가 전래가 되면서 무명을 만들어 입었고, 그 무명이 결국 화폐 대용이 된 것이다. 이는 태조시록에서도 문익점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세종실록에도 문익점의 공을 기록했는데 ”백성의 이(利)를 일으켰으니, 그 혜택을 생민(生民)에게 입힘이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라고 돼있다. 정조실록에서도 문익점 서원에 사액을 내리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만큼 문익점은 조선시대 내내 가장 중요한 인물로 취급됐다. 그것은 화폐 대용이 삼베에서 무명으로 바뀌게 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조선시대 군역의 부담을 지는 대신 군포를 세금으로 납부하게 됐는데 1년에 정포 2필을 바치게 했다. 그마저도 백성들의 삶을 힘들게 한다면서 영조는 균역법을 제정하고 반값 군포를 내게 했다.붓뚜껍 신화는 없다
다만 문익점의 붓뚜껍 신화는 없었다는 것은 역사적 기록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문익점이 조선시대 내내 칭송을 받았던 이유는 ‘밀수’가 아니라 무명의 ‘보급’이다.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들여올 때 실을 뽑아내는 기계와 실 잣는 기구를 들여왔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우리나라의 무명 산업이 발달하면서 농촌의 생활이 달라졌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